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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AG로 다시 떠오른 평영행 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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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철의 인사이드스포츠]AG로 다시 떠오른 평영행 불발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 때 남북한 선수단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동시입장하는 모습. [사진=Getty Images/멀티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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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스포츠기자 생활을 하면서 아쉬웠던 일이 하나 있다. 지난 23일 조선중앙통신이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한이 출전한다고 보도한 내용을 읽으면서 20여 년 전, 그때 그 일이 떠올랐다.

1990년 가을, 중국은 자국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종합경기대회인 제11회 여름철 아시아경기대회를 베이징에서 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다. 이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과 글쓴이를 비롯한 취재진은 입국사증 대신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가 발급한 대회 참가 증명서를 들고 갔다. 그래서 그때 중국에 다녀온 흔적은 여권에 남아있지 않다.


한국과 중국은 1983년 중국 민항기 반환 협상을 계기로 서로 조심스레 접근하고 있었다. 이 협상에서 중국은 우리나라의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을 사용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한국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이 아닌 ‘중공(중국 공산당의 약자)’으로 불렀다. 그만큼 두 나라의 관계는 소원했다.

한국과 중국이 가까워진 데에는 스포츠가 적잖은 기여를 했다. 민항기 반환 협상 이듬해인 1984년, 두 나라는 테니스 남자 국가 대항전인 데이비스컵 아시아 동부 지역 예선 2회전에서 맞붙게 됐다. 중국은 북한을 의식해 이 경기를 제3국인 홍콩에서 갖는 방안을 국제테니스연맹(ITF)에 제시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의 대회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ITF의 압력과 베이징이 1990년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처음으로 한국 선수단에 문을 열었다.

김춘호와 이우룡, 송동욱, 유진선, 노갑택 등 한국 선수 8명은 홍콩에서 입국사증을 받은 뒤 입국했다. 중국은 북한을 되도록 덜 자극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2천여km나 떨어진 남서 지방의 쿤밍을 경기 장소로 정하면서까지 한국 선수단의 입국에 신경을 썼다. 경기는 대회 관계자와 보안 요원 등 극히 제한된 인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쿤밍시 외곽 체육관에서 열렸다. 테니스는 기본적으로 옥외 경기다.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 등 관례적인 의식은 생략됐다. 한국 취재진도 동행하지 않았다. 매우 조심스러웠던 두 나라의 첫 번째 스포츠 직접 교류다.


1984년에는 선수단과 서울신문 이대행 기자 등 10명의 취재진을 포함한 34명의 비교적 많은 인원이 제10회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상하이로 갔다. 이들은 도쿄에서 입국사증을 발급받고 입국했다. 이 대회 결승에서 한국은 중국을 62-61로 꺾고 1978년 쿠알라룸푸르 대회 이후 4연속 우승했다.


서서히 교류의 규모를 키워가던 두 나라는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중국이 대규모 선수단과 취재진을 보내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한국은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에 임원 142명과 선수 552명 등 694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두 나라는 1992년 마침내 수교하게 된다.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9월 22일~10월 7일)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뿐 아니라 한국과 북한이 가까워지는 계기도 됐다. 이 대회에서 남북한은 단일팀 구성에는 실패했지만 공동 응원을 하는 등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대회가 한창 진행되던 9월 29일 남북 양 측은 평양(10월 11일, 5·1경기장)과 서울(10월 23일,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경기대회를 갖는다는 내용의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


이 대회에는 글쓴이가 일하던 스포츠서울이 사회부와 문화부 기자까지 차출해 20명이 넘는 취재진을 파견하는 등 모든 언론사가 중국과 대규모 첫 교류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이 모두 평양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북 취재단의 규모가 20명으로 제한돼 회사별로 누가 갈지를 정해야 했다.


당시 경력 10년을 막 넘어섰던 글쓴이의 고향은 평양 인근 평안남도 강서군이다. 고구려 시대 벽화로 유명한 ‘강서대묘’가 있는 강서군은 요즘은 행정 구역이 바뀌어 남포시 강서구역이 됐다. 우리로 치면 인천광역시 부평구쯤 된다고 보면 될 듯하다. 나름 경쟁력을 갖췄다고 생각했지만 글쓴이는 여정에 합류할 수 없었다. 강력한 상대가 있었다. 경력이 5년 이상 많은 B 모 선배다. 그는 실제로 원산에서 살다 남쪽으로 온 실향민 1세대였다. 게다가 축구 기자로 오랜 기간 활동한 경력도 있었다. 무늬만 실향민이고 야구가 주 종목인 글쓴이보다 두어 발 앞선 경쟁력이었다. 글쓴이의 7년 후배인 한겨레 이길우 기자는 북한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데 취재단에 합류했다.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그때는 어린아이 같은 아쉬운 마음이 실제로 들었다. 1948년 월남한 글쓴이의 아버지는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와 남북통일축구경기대회가 모두 끝나고 10년 뒤, 다시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신 가 볼 수 있던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 기회를 놓친 아쉬운 마음은, 어린아이 같지만 오늘도 여전하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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