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나타난 안철수 의원에 "사진 찍자"…사고원인 규명되지 않았는데 "놀라운 행정력" 자화자찬
[아시아경제 이혜영 기자] 참담했다. 천장이 내려앉은 체육관은 그야말로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처참하게 깨진 유리창은 학생들이 탈출을 위해 벌인 사투가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는 듯 했다. 건물 안팎에는 피 묻은 옷가지와 신발이 주인을 잃은 채 눈밭을 나뒹굴었다. 벽면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 적힌 글귀만이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걸 얘기해주고 있었다.
참담했던 건 사고 현장뿐이 아니었다. 115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재난이었지만, 이 사고를 수습해야 할 책임자들의 태도는 무너져 내린 건물과 비슷한 수준의 절망감을 맛보게 했다.
18일 오후 안철수 새정치연합 의원이 사고현장을 방문했을 때 그 참담함은 현실이 됐다.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정수성 새누리당 의원(경북 경주), 경주시 관계자, 관할 경찰서장과 소방서장 등 관계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사고대책본부에서 경위와 수습 상황을 들은 안 의원이 사고 현장을 향하자 이들도 우르르 뒤를 따랐다. 별반 다를 게 없는 상황 설명은 현장을 오가며 수차례 반복됐다.
정치인들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왜 그렇게 안 의원 옆에 서려 했는지 그 이유는 조금 뒤에 확인할 수 있었다. 안 의원 일행이 사고 현장을 떠나려는 순간 "사진 한 번 찍으시죠 다들. 한 번 찍어놔야지 그래도"라는 말이 들렸다. 귀를 의심했지만 그 말은 이번 사고를 책임 있게 수습해야 할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의 제안에 주변에 있던 정치인과 관계자들은 웃음으로 답했다.
노련한 정치인들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를 잊은 듯했다. 사고대책본부로 돌아가며 이들은 "여야 의원들이 나란히 서 있는 게 보기 좋네"라며 아까의 웃음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다.
조금 전까지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사고 재발방지를 얘기하고, 비통함을 전하던 이들이 얼굴을 바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대형사고를 겪고 또 겪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왜 제자리걸음을 하는지 그 이유를 이들의 말과 행동이 증명했다.
오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18일 새벽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과 허남식 부산시장에 이어 이성한 경찰청장,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의원 등이 차례로 방문하자 사고대책본부는 브리핑본부로 바뀌었다. 현장 파악은 제대로 하지 않고 브리핑 준비만 하다 보니 사상자 정보부터 곳곳에 오류투성이었다. '높으신 분'들을 응대하느라 바빴던 대책본부 관계자들은 정작 유족들에게는 한참이 지나도록 그 어떤 상황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고 발생 사흘째 되던 날. 대책본부에서는 "사고가 나고 5시간 만에 상황이 종료됐다. 외국 같으면 상상이 안 될 정도다. 놀라운 행정력을 발휘했다"는 자화자찬을 늘어놨다. 바깥에서는 유가족들이 울부짖고 원인규명도 본격화되지 않았던 때다. 희생자들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을지조차 불투명하던 그 시각 우리 행정기관은 이런 발표를 내놓으며 유족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대못을 박았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딸이 마지막으로 희생하는 것으로 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고 김진솔 양의 아버지 김판수씨가 울분을 짓누르며 온 힘을 다해 우리 사회에 부탁한 말을 이들은 듣기는 한 걸까.
이혜영 기자 itsm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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