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지난 15일(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올림픽 공원의 미국 홍보관은 분주했다. 블라디미르 푸틴(61) 러시아 대통령이 경호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검은 정장 속 하늘색 오픈 셔츠. 옷깃에는 빨간 색의 '팀 USA' 핀이 있었다. 소파에 앉은 푸틴은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래리 프롭스트와 사무총장 스콧 블랙먼에게 레드와인을 건넸다. 환담한 뒤 블랙먼 사무총장은 "푸틴은 매우 정중했다. 우리가 이번 올림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했다"고 전했다. 이어 "러시아 스포츠를 일으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는 냉랭하다. 최근 우크라이나 시위, 시리아 내전, 에드워드 스노든 문제, 러시아의 동성애 통제법 등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AP 등 외신은 푸틴의 방문을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불거졌던 갈등을 봉합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시도로 풀이했다. 국제평화 증진을 목표로 하는 올림픽은 외교력을 뽐낼 좋은 기회다. 소치 동계올림픽을 설계하고 주도한 푸틴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축제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었다. 로사 쿠토르 알파인센터 등으로 가는 45㎞ 도로와 철도 건설에만 약 10조원이 들었다. 대회 운영까지 약 53조원이 쓰였다. 당초 책정한 약 13조원에서 4배가량 늘어 2008년 하계올림픽을 유치한 베이징의 약 45조원을 훌쩍 넘었다. 푸틴은 경제적 부담에 대한 우려를 무시했다. 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만 강조했다.
국민들은 푸틴이 외쳐온 '러시아의 영광'에 취했다. 동계올림픽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는 20일 현재 금메달 6개, 은메달 9개, 동메달 7개로 종합순위 4위다. 금메달 3개에 그친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의 부진을 털었다. 독립국가연합으로 나선 1992년 대회 포함, 하계올림픽에서만 일곱 차례 정상에 오른 옛 소련의 위엄을 상당 부분 재현했다. 옛 소련은 동계올림픽에서도 일곱 번이나 1위를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붕괴, 연방의 분열과 함께 위상은 한풀 꺾였다.
푸틴은 스포츠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재건했다. 대표팀에 연간 2000억 원 가까이를 지원하는 한편 선수들에게 확실한 동기를 부여했다. 러시아 정부, 지방 정부, 기업이 내놓는 두둑한 포상금이다. 나라 밖으로도 눈을 돌렸다. 외국인 코치를 영입하고 쇼트트랙의 안현수, 피겨스케이팅의 타티아나 볼로소자 등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의 귀화를 성사시켰다.
푸틴은 2008년 벨로루시 등 동유럽 8개국 클럽이 참가하는 콘티넨탈하키리그(KHL)도 만들었다. 소치 동계올림픽 개막 전 루카셴코 벨로루시 대통령과 함께 아이스하키 친선경기에 직접 출전할 정도로 푸틴은 아이스하키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스포츠광이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익힌 삼보와 유도에 관심이 많다.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삼보·유도대회에서 우승했을 정도다. 극진공수도 6단에 2012년 국제유도연맹(IJF)으로부터 공인 8단을 받기도 했다. 2004년 공저자로 '푸틴과 함께 유도를'이라는 교범을 내기도 한 그는 IJF 명예회장이다.
스포츠로 '터프가이', '마초' 등 남성적인 이미지를 굳힌 푸틴은 이번 올림픽으로 국제스포츠의 강력한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 덕에 2012년 대선과정에서 불거진 부정선거 논란과 반푸틴 시위로 상처받은 리더십을 온전하게 회복했다. 세계를 향해 러시아의 힘도 과시했다. 소치는 독립 이후 미국, 유럽 등의 지원을 받는 조지아와 가깝다. 러시아는 조지아에서 일어난 남오세티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소치는 이슬람 반군세력의 거점과도 가깝다. 이번 올림픽은 러시아가 코카서스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메시지로 충분해 보인다. 민주주의 후퇴,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옛 동맹국들의 이탈로 외교적 궁지에 몰렸던 푸틴은 사라졌다. 크렘린의 위상이 한껏 높아진 가운데 '차르'의 귀환만 있을 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판을 벌였지만, 마침내 소치올림픽의 가장 큰 승리자가 됐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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