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본떠 한자를 만들었을 때 귀신들은 밤새 울부짖었다. 신령스러운 용은 구름을 타고 올라가버렸으며 신은 곤륜산으로 옮겨가버렸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으로부터 훔친 불과 함께 문자를 인류에게 가져다주었을 때 제우스는 격노해 그를 얼음산에 묶어놓고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왜 인간은 용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으며 프로메테우스는 끔찍한 벌을 받았는가. 왜 귀신들은 밤새 울었고, 제우스는 진노했는가. 인류에게 문자는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것이라는 것을, 결단코 선물이 아닌 화가 될 것이라는 걸 예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문자가 인간의 오만을 부르고 그 오만이 그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할 것이라는 것에 비탄과 애도를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우리 앞에 문자가 펼쳐 내는 풍경을 보며 나는 오래 전의 그 비탄과 격노를 듣는 듯하다. 요즘 우리가(인류가, 아니 한국 사회가) 문자로써 하고 있는 일들은 과연 우리 자신이 문자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들게 하고 있다. 글로써 글을 죽이고, 말로써 말을 억압하며, 사실로써 진실을 가리는 현실. 범람하는 것은 잡설(雜說)과 요설(妖設)과 기담(奇談)과 한담(閑談)이다. 넘치는 것은 하찮은 농지거리의 만담(漫談)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혀를 달래는 미담(味談)이며, 또한 재미만 있으면 모든 게 용납되는 또 다른 미담(味談)이다.
마치 몸뚱이는 없이 옷가지, 장신구만 현란한 것과 흡사하다. 2500년 전 한 현인이 말한 것처럼 알맹이(質) 없이 껍데기(文)만 요란한 것이다. "책(글)은 인류의 저주다. 인간에게 내리는 최대의 불행은 인쇄의 발명이다(디즈레일리)"라는 개탄은 그 누구보다 지금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둔 말인 듯하다.
창힐의 초상을 보면 그는 네 개의 눈을 갖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두눈박이 인간들은 문자를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들게 하는(루쉰)"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지금 두 눈도 아닌 외눈박이가 돼 문자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중 가장 흉측한 외눈박이, 그것은 다름 아닌 미디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흉측한 것은 그 생김새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외눈인 줄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런데도 외눈박이로 두눈박이를 가르치려 하기 때문이다. 흉측한 데다 파렴치한 괴물이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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