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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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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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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둑길이 끝나고 화실로 들어가는 길과 동네로 들어가는 길이 나뉘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운학이 일하던 포도밭 과수원 어귀였다.


거기서 운학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춤하더니 돌아서서, "여자 맘이란 알 수가 없는 거요. 사실 그녀는 내게 기도원이 완성되면 거기서 집사로 일해달라고 부탁까지 했다우. 어차피 그녀 아버지 영감은 오래지 않아 돌아가실 거고, 그녀는 혼자가 될 거요. 집사건 뭐건 난 그녀 곁에만 있으면 돼요. 안 그렇수?" 하고 말했다.

그리곤 하림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아까 화를 낸 건 미안하오. 하지만 전에도 말했지만 여기에 머무는 동안 조심하는 게 좋을거요. 멀쩡한 개가 죽어나가는 마당에 사람이라고 무슨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하고 경고인지 당부인지 모를 말을 뱉어놓고는 다시 몸을 돌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을 잡고 걸어갔다. 하림은 어둠 속으로 뒤뚱거리며 사라지는 그의 등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 이윽고 화실로 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사방은 어두웠고, 푸른 초승달은 출발할 때보다 한 뼘 쯤은 더 기울어져 있었다. 화실 창문 너머로 새어나온 불빛이 빤히 보였다. 바람은 훨씬 잦아들었고, 사방은 처음 이곳에 올 때와 같이 깊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하림은 마치 한바탕 꿈 속이라도 헤매다 온 느낌이 들었다.

방으로 들어와서 가스렌지에 물을 올려놓고 라디오를 틀었다. 그리곤 탁자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달력 속 그림을 바라보았다. 꽃을 머리에 인 여인을 그린 천경자의 그림 달력이었다. 천경자의 그림 달력은 2010년 5월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란 줄무늬 커튼이 쳐진 창문은 아까 남경희가 나갈 때 열어놓은 채 그대로였다.


모든 것은 처음 이곳에 올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화선지에 물이 스며들 듯 소리 소문 없이 달라졌다. 하소연이가 그랬고, 이장 운학이 그랬고, 이층집 여자 남경희가 그랬다. 그리고 총으로 개를 쏘아죽여 끌고 가는 장면도 우연히 목격한 터였다.


처음 이곳에 올 땐 그런 일들이 자신에게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에게 자기는 낯선 존재였고, 그들 역시 자기에게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어느 틈엔가 점점 그들은 자기가 되어갔고, 자기는 그들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갔다. 아니다, 강 건너 불이다, 남 똥 누는 데 용쓰기다, 하면서도 점점 거미줄의 끈끈이에 걸린 나방처럼 버둥거리며 말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짐을 싸서 차에 싣고 도망이라도 치듯 가버리면 그만이었다. 누가 말릴 사람도 없었고, 잡아둘 사람도 없었다. <전쟁이 인간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만화 대본도 이제라도 그만두면 그만이었다. 배문자에게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녀 역시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쯤 꽁지머리 만화가 오현세랑 꿀맛의 신혼살이에 정신이 없어 그런 일 따윈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인생이 아무리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요, 미완성일 뿐이라지만 그런 순간 순간의 관계들을 다 젖혀버린다면 남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런 순간 순간의 관계들이 모인 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들 속에 하림이 선뜻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약속이었다. 그녀는 혜경이 떠난 자리, 그의 텅 빈 가슴 속으로 날아온 한 마리 작은 새나 다름없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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