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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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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9장 어둠 속의 두 그림자(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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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고보니 우스웠다. 자기가 그렇게 맹세를 하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도 아니 드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기 속에 손톱만큼 비밀스럽게 일어났던 남경희에 대한 관심을 그렇게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자기에게 스스로 다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강한 부정 뒤엔 언제나 일말의 진실이 숨겨져 있는 법이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말처럼, 강하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인간이 범인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추호도 그녀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와 헤어질 때 달빛에 비친 그녀의 눈빛과 마주쳤을 때 순간 출렁였던 마음의 흔적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달빛에 젖은 그녀의 얼굴은 하얗고 몽환적으로 보였었다. 비록 눈 깜박할 사이라곤 했지만 면도칼처럼 마음의 표피를 살짝 베고 지나간 달콤한 흔적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단지 누구도 알 수 없는 흔적이었고, 자기 자신조차 느낄 수 없었다는 것 뿐이었다.
프랑스 시인 아르망 프뤼돔므가 쓴 ‘깨어진 화병’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화병에 부채가 부딪혀 금이 가/ 마편초 꽃이 시들어갑니다.
살짝 스치기만 하고/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하지만 가벼운 금은 매일/ 수정을 좀 먹어
눈에 띄지 않지만 뚜렷한 걸음으로/ 천천히 화병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신선한 물은 방울방울 새어/ 꽃의 수분이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걸 알지 못했어요./ 손대지 마세요, 깨어졌으니까.
사랑하는 이의 손이, 살짝 마음을 스쳐/ 상처 입힐 때가 있지요.
그러면 마음은 절로 금이 가서/ 사랑의 꽃은 시듭니다.
언제나 남의 눈엔 띄지 않지만/ 가늘고 깊은 그 상처가
차츰 커지고 소리없이 우는 것을 느낍니다.
깨어졌으니 손대지 마세요!

하지만 분명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잠시 달빛 때문에 한번 출렁거렸을 뿐이었다. 그런 출렁거림은 누구에게라도 있을 수가 있을 것이었다. 그게 남경희가 아니라 하소연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깔깔거리던 젊은 그녀에게도 슬픔이 있었다.
“알고 보면.... 난 속물이예요.”


소연이 말했었다.
“속물....?”
하림은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사실 나도 기다리고 있는 게 있긴 있어요.”
소연은 웃고있는 하림을 쳐다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었다.
“들으면 실망할 거예요. 내겐 영화 속 마리오처럼 그런 고상한 기다림이 아니라, 아주 흔해빠진 기다림 같은 것. 솔직히 말하면 대학 가고 싶고, 돈도 벌구 싶고, 그래서 오빠처럼 지적이고 멋있는 남자친구랑 사귀어보고 싶은.... 그런 기다림, 그게 전부예요.”


어쩌면 그런 그녀의 가슴 속 화병에 금을 가게 한 것이 자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하림이 정작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지금 운학이 죽자 사자 난리를 피우고 있는 남경희 그녀가 아니라 하소연이였다.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남자와 여자가 몸을 섞었다는 자체는 하나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에게 혜경이 어느새 과거가 되어가는 존재였다면 하소연은 현재였고, 미래로 이어지는 존재였다.

글. 김영현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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