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연미 기자]9일 기자회견장에 선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다. 다변(多變)으로 소문난 김 총재이지만, 이날 설명은 유독 두서없고 장황했다.
"지난 달과 경기인식은 같다"면서 왜 금리를 내리는지, "이젠 정부가 나설 차례"라더니 왜 한은이 나선 건지, 김 총재는 납득할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아리송한 수사로 엄호했지만 자기부정의 논리는 옹색하고 구구절절했다.
불과 나흘 전 김 총재는 금리 동결의 당위성을 말했다. 한은은 되풀이해 "4월까지의 금리 방향을 말한 것"이라 해명했지만, 포괄한 시점은 비단 과거에 머물지 않았다.
김 총재는 지난 5일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가 열린 인도 델리에서 "(기축통화를 가진)미국이나 일본이 아닌데 어디까지 내리라는 말이냐"며 지난해 두 차례의 금리 인하를 통해 충분히 돈을 풀었다고 강조했다. 연초부터 언급한 정책공조는 "한은이 먼저 (효과)1년짜리(금리 인하)를 깔아두었으니 정부에 '이제 네 차례'라고 말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지난 달 금통위 직후 시장에 준 메시지도 명료했다. 김 총재는 "통화정책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면서 "쉬운 선택이 아니라 옳은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채권 시장의 아우성 때문에 금리를 내리진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는 이후 틈날 때마다 "저금리의 보이지 않는 위험성"을 지적했다.
그랬던 김 총재가 말을 바꿨다. 김 총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옆 나라들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나가야 한다"면서 "선진국과 같은 수준으로 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선진국의 금리가)변화할 때는 같이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인도ㆍ호주 등의 금리 인하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는 아울러 "추경 효과 극대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금리를 내렸다"고 했다. "이를 통해 재정승수가 크게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을 덧붙였다.
김 총재의 자기부정을 끝으로 정부와 한은의 기 싸움은 일단 정리됐다. 추가 금리 인하를 두고 다투기 전까진 나라경제 앞에서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는 비판, 경기 하강에 따른 책임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
문제는 곤두박질친 중앙은행 총재의 권위다. 지난 달 금리를 내리는 대신 신설한 3조원의 총액한도대출은 아직 지원 심사도 끝나지 않았다. 김 총재가 말한 '유동성 정밀타격론'의 유통기한은 고작 한 달이었다.
이날 기자회견의 백미는 김 총재가 소수 의견이 있었다고 밝힌 대목이었다. 김 총재는 "이달 금통위에서 소수 의견을 낸 건 한 명뿐이었다"고 말했다. "총재가 반드시 소수 의견을 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된다"는 언급도 나왔다. 의사록 공개 전 연막을 친 게 아니라면, 김 총재는 금리 인하에 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금통위 당일 표 대결 현황을 밝힌 건 이례적이다.
김 총재의 설명은 질문을 불렀다. '그렇다면 이달이 아니라 인하 기대가 높았던 지난 달에 내렸어도 무방하지 않았는가' '동결 신호를 주고 금리를 내려 또 시장과 사인이 안 맞은 게 아닌가' '동결 의지를 보이더니 인하 카드를 던진건가'.
쏟아지는 질문 속에 마무리된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오며 한은 직원들은 울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면서 왜 그러세요."
박연미 기자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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