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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기증 작품들, 11년째 낮잠자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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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화가로 손 꼽히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미술관 창고에서 잠을 자고 있다. 천 화백이 15년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93점은 미술관과 천 화백의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시민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천경자 딜레마', 이 문제를 풀 방법은 없을까.


서울시립미술관이 기증받은 천 화백에 대한 '반환-존치' 논란은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난 2월 천 화백의 딸이자 기증협약상의 대리인인 이해선씨가 지난 1998년 고건 전 서울시장 시절 천 화백이 시립미술관 측에 기부한 작품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 문제는 불거졌다. 천 화백과 함께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이 씨는 최근 아시아경제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반환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나 경제적 곤란 등으로 인해 작품을 돌려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최근 서울시와 서울시의회의는 '존치'와 '반환'을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지만 뽀죡한 대안을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함께 애초에 기증 협약을 맺을 당시 모호한 내용들이 이런 문제를 초래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천 화백 작품의 기증협약 당시 계약서에는 "전시활용에 대해서는 천 화백을 대리해 딸 이 씨와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시립미술관과 이 씨 간의 협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이에 따라 미술관은 전시관 내 작품과 배치를 한 번도 바꿀 수 없었다.


◆서울시 "지금처럼 존치하고 전시" VS 서울시의회 "반환하자" = 계약상 영구전시를 조건으로 열리고 있는 '천경자의 혼' 상설전(展)은 지난 2002년 서소문본관 서울시립미술관이 개관하면서 11년째 똑같은 모습으로 열리는 중이다. 전시 공간은 미술관 2층 내 전시장 좌측 70평 규모로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화 작품 50여점을 비롯해 화구 등 총 기증품 93점 중 32점은 전시장에 비치돼 있으며 나머지 61점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지난해 11월 28일 서울시의회 정례회 시정질문에서 정세환 의원은 "천 화백의 그림이 보물에서 애물단지가 됐다"며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까지 천 화백의 대리인 이씨와 협의가 잘 안 돼 시립미술관 전시 공간의 활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가뜩이나 미술관 전시장이 다른 국공립 미술관에 비해 작은 규모라 대규모 기획전이 열릴 경우 관람 동선에 걸림돌이 된다는 의견이었다. 정 의원이 이에 대한 대책이 없는지를 묻는 질문에 당시 박 시장은 "참 난감한 상황"이라며 "천 화백 측의 (전시활용에 대한) 동의를 얻기 힘든 상황이고, 신뢰의 문제와 추가적인 손해배상도 생각해야 한다"며 명확한 답변을 피했다.


천 화백 가족의 기증작품 반환요구가 알려진 후 열린 지난 4월 16일 서울시의회 임시회에서도 박 시장과 정 의원은 같은 주제로 질의와 답변을 나눴다. 정 의원은 "공간 문제 때문에 서로 대화가 잘 안되니까 '돌려 주자'는 것은 못하겠다는 것이고, 힘들어도 약간씩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금 현 상태를 유지하고 가겠다는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박 시장은 "우선 천경자 선생님이 처음에 기증하신 뜻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고, 전시상의 여러 문제 때문에 옮기거나 이런 것들을 협의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유족들이 굉장히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면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당연히 현재 상태대로 전시하는 것이 좋겠다는데 동의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처럼 시립미술관 내 천경자 상설전에 대해 서울시는 '존치'를 고수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측도 "협약에서도 명시돼 있듯 서울시가 기증 작품에 대한 소유권과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어 반환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전시활용의 어려움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상태이며, 천 화백 측의 반환 요구에 대해서도 대안은 아직 마련되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문제의 핵심은 '계약'= 천 화백측이 기증 작품을 반환하라고 요구한 이유에 대해 시립미술관 관계자는 "관리가 소홀하다며 서울시에 돌려달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미술관 측은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따로 별도의 보관소를 마련해 관리하고 있으며 항온ㆍ항습 환경도 국제박물관협의회 기준을 유지하는 등 엄격히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립미술관은 지난 2009년부터 매년 2회씩 외부회화복원 전문가들에게 작품 상태점검을 통해 양호하다는 검증을 받았다. 이처럼 천 화백 작품에 대한 관리부분에 미술관측과 천 화백측은 확연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또 그동안 가장 문제가 됐던 전시활용 측면에서도 양측은 단 한 번의 협의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양 측간의 이 같은 갈등에는 기증 협약서의 내용이 허술했던 점도 큰 이유로 지적된다. 정 의원은 "지금이야 계약서상 내용이 구체적이고 단어 하나하나에 민감하지만 10년 전에는 선의로만 기증을 받았을 뿐 계약조건이나 내용이 굉장히 단순했던 것이 문제를 유발한 것일 수 있다"며 "'대리인과 협의해야한다' 정도의 계약조건도 매우 추상적인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기증 작품을 받게 될 땐 조건이 있는 경우 기증을 아예 받지 않는다. 중앙박물관 관계자는 "박물관 권한으로 기증품을 활용할 수 없거나, 전시실을 내 달라는 요구가 있을 시, 사례비를 달라고 할 때 등 까다로운 경우에는 기증을 받지 않는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기증 이후 문제가 벌어진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중앙박물관의 경우 기증 협약서라기보단 '기증 수납서'라는 증빙서를 기증자에게 주고, 이후 기증품은 국가유물로 등록되며 기증 이후 반환은 할 수 없게 돼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국내 미술계 등에 따르면 천 화백은 기계에 의해 생명을 부지할 정도로 노환이 심한 상황이다. 이 씨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라 한국을 방문할 때 국내 갤러리 등을 통해 천 화백의 작품을 팔아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천 화백 작품이 시민들을 제대로 만날 수 있을지는 '반환'이냐 '존치'냐의 양자 택일이 아닌, 제3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인 것으로 알려진 천 화백 가족 측의 사정, 기증 당시에 비해 급등한 천 화백 작품의 가치 등을 고려해 '묘안'이 나올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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