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림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서있자 이장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
“수도 고치는 데는 내가 아니까 전화를 해보겠소. 얼마가 들진 모르겠지만.....”
하고 말했다. 하림은 별 수 없이 다시 윤여사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전화를 받은 윤여사는 옆에 이장이 있으면 좀 바꾸어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이장은 응, 그래, 예, 맞어. 걱정마. 알았어요, 하며 반말과 존댓말을 반반씩 섞어서 대답하고는,
“씨펄, 내가 지 종인가? 이래라 저래라 하게.”
하고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렸다.
그리곤 곧 이어 핸드폰을 뒤적여 읍에 있는 펌프 수리점 전화번호를 찾았다. 수리점이 나오자 이장은 갑자기 무게를 잡고 말했다.
“아, 여기 살구골 이장인데, 응, 나 운학이, 수도가 얼어터졌는가 싶구먼. 빨리 좀 와주소. 오전 중으로 와. 급하니께. 알았어!”
그렇게 급할 것 하나 없는 일을 가지고 급한 것처럼 다그쳤다. 수리점에 전화까지 넣고 나자 이장도, 하림도 더 이상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하림은 자기가 어디까지나 이곳에는 손님에 불과하며, 따라서 수도를 고치든 말든 자기에겐 아무 책임도 없다는 사실을 이장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싶어서 그가 그러는 동안 짐짓 뒷짐을 진 채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혹시 마시다 남은 술 없수?”
할 일 없으니 염불이라고 이장 운학이 말했다.
“소주팩 가져온 게 있는데.... 드실래요?”
하림이 말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여기 올 때 혼자 홀짝거릴 참으로 넣어온 것이었다.
“아무거라도 좋수다. 난 청탁을 가리는 사람은 아니니까.”
운학이 젠 체하고 대답했다.
하림은 다시 물통을 들고 화실 현관 쪽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운학도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따라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온 운학은 이곳이 처음인 듯 강아지 새끼처럼 킁킁거리며 사방을 먼저 한번 둘러보았다. 하림이 가방을 뒤져 소주팩 세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놓고, 컵과 안주거리로 일회용 포장 김을 들고 왔다.
“라면 없수? 소주 궁합에는 라면이 젤 인데....아침부터 힘썼더니 어쩐지 출출하구먼.”
하고 말 타더니 경마 잡히더라는 옛 속담대로 운학이 의자에 앉으며 체면없이 내뱉었다. 하림은 가타부타 말없이 냄비에 조금 전에 떠 온 물을 붓고, 가스불에 올린 다음 박스에서 라면을 꺼내었다.
“잘 아시겠지만, 윤재영이 지금 나이 들어 그렇지 예전에는 꽤나 얼굴 값 하고 다녔다오. 그림인가 뭔가 그리지, 자기 아버지 고물상 해서 돈도 많지, 하여간 잘 나갔어요.”
물이 끓는 동안 운학은 컵에다 소주를 따라 놓고 홀짝거리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림은 그의 말을 한 귀로 들으며 라면 포장을 뜯었다.
“나두 한때 좋아한 적이 있었소만.”
그리고나서 컥컥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 다리만 이렇게 되지 않았어두..... 아니야, 멀쩡했어두 난 아니야. 그 앤 욕심이 너무 많아. 거들먹거리는 꼴도 보기 싫었구.”
그리고나서 갑자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림을 바라보며,
“근데 장하림이라 했나요? 그냥 부르게 좋게 앞으로 장선생이라 하겠소. 그래, 장선생하군 어떤 관계요?”
하고 느닷없이 물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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