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원이라....’
소연이 돌아간 후 하림은 다시 자리에 누워 그녀가 떨어뜨려 놓고 간 이야기를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영감과 기도원. 영감의 딸과 기도원. 어렴풋이 거기에 무슨 실마리가 숨어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연이 이야기로는 그것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도원을 짓겠다는 영감네 부녀와 동네 사람들 간에 무언가의 알력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감이 윤여사네 고모할머니집의 멀쩡한 개를 쏘아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소연이를 통해 그만한 정보를 얻은 것이 어디인가. 근데 생각하면 우스웠다.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 마치 낯선 시간대로 타임 슬립이라도 된 것처럼 앞의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일들에 벌써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노랑머리 하소연이만 해도 그렇다. 만난 지 겨우 몇 시간이 되었을까 말까 했는데 벌써 오빠고 소연이었다. 거기에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처럼 이런저런 이야기가지 나누었으니 생각하면 사람 사는 일이 별 게 아닐는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이 낯선 골짜기에서 그나마 자기랑 말이 통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노랑머리 젊은 여자아이를 만났다는 건 분명 행운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연이는 얼마동안, 중풍에 걸린 자기 사촌언니의 슈퍼를 봐주기 위해 와있단 말이렸다. 방학도 아닌데.... 그렇다면 학생은 아닐테고.... 그렇담 뭘 하는 애일까.’
하림은 누워서 공연히 쓸데없는 공상을 해보았다. 그녀의 귀 밑에 보이던 나뭇잎 같이 생긴 희미한 푸른 점이 괜히 마음에 걸렸다. 제법 큰 그 점은 마치 한지에 은은하게 배인 물감처럼, 노랑머리와 선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쓸데없는 공상에 젖어 있는데, 라디오에서는 마침 이라크에서 또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삼십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그런 지구촌 뉴스도 흔해 빠져서 뉴스 같지 않게 들렸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소름 끼치도록 끔직한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보다 더욱 끔직한 것은 그런 끔찍한 뉴스를 일상적인 것인 양, 식탁에 앉아 혹은 침실에 누워 마치 축구 중계나 대하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을 자기 같은 사람들일 것이었다. 자살 테러란 문자 그대로 자신을 죽임으로써 적을 동시에, 순식간에, 함께,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증오와 절망의 끝에 서있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일 것이었다. 겨우 열다섯 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 소녀가 온몸에 폭탄을 감고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스위치를 눌러 산산이 폭발하는 장면이라니....
언젠가 자살 테러를 하러갔다가 끝내 하지 못하고 잡힌 아랍의 소녀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소녀의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라 두려움이었고, 슬픔이었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를 잔혹한 자살 테러의 현장으로 몰아넣은 것은 야훼의 이름으로 그곳을 침략한 십자군이었을 것이며, 알라의 이름으로 이들과 대항하는 이슬람일 것이었다.
인류의 역사에 알라와 야훼의 이름으로 드리워진 너무나 오래된 증오, 너무나 오래된 전쟁.... 끝이 없는 테러와 끝이 없는 테러와의 전쟁.....그것을 부추기는 사악한 영혼들....
어쩐지 그 증오의 강은 인류가 종말을 맞기 전에는 결코 건너갈 수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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