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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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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3장 화실이 있는 풍경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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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급할 거야 없었다. 이곳에 온 지 겨우 반나절 밖에 되지 않았던 터였다. 깨알처럼 많은 지상의 나날이었고, 앞으로 여기 머물 날도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었다. 초반에 이만한 정보를 얻은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면 행운일 것이었다. 하림은 소연을 따라 현관 유리문께로 바래다주러 나왔다.

“사촌언니한테 토란국 고맙다고 전해줘. 몇 살인지 모르겠지만.”
“후후. 꿈 깨요. 언니라지만 머리가 반백인 쉰 넘은 쪼그랑 할머니니까.”
소연이 소녀처럼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도 너보다는 낫겠는걸. 나도 할아버지니까.”
“에게게. 나보담 몇 살이나 더 자셨다구? 그럼, 다시 하림 아저씨라 불러줄까봐.”
“맘대로 하셔.”


그렇게 할 일없이 농담을 하며 소연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사방은 벌써 잉크병처럼 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서늘하지만 신선한 공기가 먼저 이마에 닿았다. 어두운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등불처럼 떠있었다. 오래간만에 보는 밤하늘, 밤하늘별이었다.

“아, 별이네!”
하림이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역시 하림 오빤 시인이셔. 감탄하는 포즈와 목소리가 다른 걸.”
소연이 웃으면서 놀리듯이 말했다.
“어흠. 어른 놀리면 혼나는 것 몰라?”
하림이 짐짓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바래다줄까?”
“아니, 됐어요. 늘 다니는 길인데 뭐. 괜히 오해 받는 싫구.”


딴은 그렇기도 할 것 같았다. 어둠 속 저쪽 산허리 쪽으로 마을 불빛이 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보였고, 마을 앞길을 따라 외등도 켜져 있었다. 소리치면 닿을만한 거리였다.
“알았어. 그럼, 여기서 인사해. 조심해서 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하림이 말했다. 소연은 고개를 까닥하고는 몸을 돌려 곧 가벼운 걸음으로 총총히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듯 걸어갔다. 어둠 속에 지워져가는 그녀의 등짝을 바라보고 있던 하림은 그녀가 완전히 보이지 않자 다시한번 밤하늘을 올려보고는, 바지 앞을 끄르고 말라붙은 화단에 대고 오줌을 갈겼다. 시원한 오줌줄기가 가시투성이 마른 장미가지에 떨어졌다. 봄이 되면 여기 화단에도 무언지 모르지만 갖가지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도시에서 온 놈들은 겨울 들판을 보면 모두 죽어있다고 그럴 거야. 하긴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농사꾼들은 그걸 죽어있다고 생각지 않아. 그저 쉬고 있을 뿐이라 여기는 거지. 봄이 와서 적당한 햇빛과 바람과 비만 주어지면 그 죽어 자빠져 있는 듯한 땅에서 온갖 식물들이 함성처럼 솟아나온다 이 말이네.’


그럴 것이다. 지금 이 겨울의 얼어붙은 땅 밑에서는 각종 씨앗들과 꽃눈, 씨눈들이 반역을 꿈꾸는 혁명군들처럼 은밀히 서로 연락을 하며 곧 다가올 봄의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다. 그러자 하림의 가슴 한구석이 까닭없이 근질거려졌다. 이상의 ‘날개’ 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날개라도 돋으려나.... 그런 쓸모없는 생각을 하며 오줌을 다 누고 나서 하림은 몰려오는 추위에 몸을 한번 부르르 떤 다음 재빨리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라디오를 켜니 아홉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까 양희은이 프로를 들으며 라면을 먹고..., 먹고 나서 한숨 자고,... 자다가 소연이 와서 깨워서 떠들다가 가고..., 그러고도 아홉시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 같으면 이제 겨우 초저녁일텐데 벌써 한밤중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글 김영현.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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