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짐승들의 사생활- 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7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1분 23초

짐승들의 사생활- 3장 화실이 있는 풍경 57
AD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어렴풋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림은 눈을 뜨고 약간 멍한 상태로 여기가 어딘가 하고 있는데, 다시 “아저씨! 아저씨!” 하는 소리와 함께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번에는 분명하게 들렸다. 하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른 현관 쪽으로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아까 낮에 만났던 하소연이 두 손에 뭔가를 들고, 조금 화가 난 표정으로 서있었다.

“아니, 사람이 도대체 왜 그래요? 아무리 두드려도 모르고... 지금 몇 신데 벌써 골아떨어진 거예요? 자러 온 것도 아니람서.”
그녀는 다짜고짜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 봤다고 큰소린가. 하림이 조금 어이없다는 얼굴로 서있으니까,
“자, 여기 받아요. 마침 토란국을 끓였는데, 아저씨 이야기를 하니까 사촌언니가 좀 갖다 주래요.”
하면서 손잡이 달린 하얀 법랑 그릇을 내밀었다.
“응?”


하림은 당황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하소연이 건네주는 그릇을 받았다. 아직 따끈한 그릇 유리 뚜껑엔 김이 잔뜩 서려 있었다. 맛있는 토란국 냄새가 코끝에 감겼다.
“바보처럼 서있지 말고 그릇 비우고 주세요.”
그런 하림을 보고 하소연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 예. 고맙긴한데.....이걸....”

하림은 우물거리며 돌아서서 법랑 그릇을 들고 싱크대 쪽으로 갔다. 그러자 하소연이 현관 안으로 따라 들어와 먼저 머리를 안으로 들이 밀고,
“와! 좋네요. 여기 살아도 여긴 처음 들어와 보네. 구경해도 돼요?”
하고 말했다. 하림이 그래라, 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강아지처럼 돌아다니며,


“이거 다 재영 이모가 그린 거죠? 정말 잘 그렸다. 그죠? 나도 화가가 되고 싶은 적이 있었는데.... 캔버스 앞에 앉아있는 모습 보면 정말 부러웠거든요. 근데 화가가 되려면 집에 돈이 많아야 한다잖아요. 생각하면 그럴 것 같아요. 이건 아저씨 책이죠? 시집이랑 소설책.....”
그렇게 두서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조금 전까지 하림 자기도 이 방의 손님 같은 존재였는데 갑자기 주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차 한 잔 할래요?”
그냥 빈 그릇으로 보내기가 그래서 하림이 체면치레로 물어보았다.
“차 있어요?”
“봉지 커피 뿐인데....”
“좋아요.”
하소연이 시원하게 대답하고는 하림이 가져온 시집 한권을 들고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림 그리려면 준비도 많이 해야 하고, 돈도 많이 들어야 하는데, 시인이 되려면 그냥 펜 한자루만 있으면 되잖아요? 내 말 맞죠?”
하림이 픽, 하고 웃었다.
“아니거든요. 펜 한자루만 있으면 시인이 된다면야 문방구 주인은 누구나 시인이 되고도 남았겠네요.”
하림이 일회용 커피를 타서 탁자 위에 놓으며 짐짓 장난스런 어투로 말했다.


“피이, 누가 그런 뜻이래요? 그냥 준비가 그만큼 간단하지 않다는 뜻이지.”
소연이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두 시 쓰고 싶은데.... 나중에 아저씨가 좀 가르쳐주면 안 될까요?”
하고 뜬금없이 말했다. 어찌 들으면 진짜 같기도 했고, 어찌 들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해보는 소리 같기도 했다.


글 김영현. 그림 박건웅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