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국격(國格)이라는 말이 있다. 온라인 표준국어대사전에 찾아 보니 '나라의 품격(品格)'이라는 뜻이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종이판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적이 없는 신조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생긴 말로, 주로 정치권에서 많이 거론되면서 귀에 익숙해졌다. '국가'를 일종의 인격체로 여기면서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인가 싶다.
최근에 국격이란 단어는 피겨 퀸 김연아 선수의 2013 세계피겨선수권대회 우승과 관련해서 많이 쓰였다. 김연아의 우승에 네티즌들은 "김연아가 국격을 높였다"며 환호했다. 김연아의 우승으로 우리나라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졌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또 세계 빙상 스포츠의 변방으로 취급하던 다른 나라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의미도 있겠다.
이처럼 국격이라는 말은 요즘 아주 흔해졌다.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세계 음악 시장을 주름잡을 때, 우리나라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에 진출했을 때나, 인천 송도에 녹색성장기금(GCF)를 유치했을 때도 나왔다. 하다못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아졌을 때도 등장한다.
그런데, 국격이라는 말에는 논란이 있다. 우선 단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문법적 지적이 나온다. 격(格)이라는 말이 과연 국가와 어울리냐는 것이다. 격은 보통 물건이나 사람에 붙이는 말로 쓰인다. 사람에게 붙으면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 또는 자격을 의미하며, 물건에 붙으면 충실한 정도를 나타내는 등급의 의미다. 국가나 신 등 초월적 존재에 대해선 격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위상(位想)이라는 말을 붙여 국위(國位)ㆍ신위(神位)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맞다.
이같은 문법적 논란에도 불구하고 국격이라는 단어를 의미 그대로 수용한다 치자. 언어는 항상 변하고 새로운 말이 등장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근 김연아나 싸이처럼 스포츠 또는 대중문화연예인의 '돌발적' 활약, 국제 기구 유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 등이 국격(또는 국위)을 높인 것이 맞냐는 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김연아의 아름다운 연기는 정말 감탄스럽다. 나비처럼 날아 올라 가볍게 얼음판에 착지하는 점프는 세계 누구도 따를 수 없다. 그의 초인적 노력과 견고한 정신력, 좌절하지 않는 도전 정신은 경탄의 대상이 될 만하다. 김연아같은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인 선수가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김연아의 선전과 국격의 향상은 동일시 될 수 없다. 국가는 물건이나 인격체가 아닌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품질 또는 분수ㆍ품위ㆍ자격으로 따질 수 없는 초월적 존재다. 공동체의 위상을 평가할 때는 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데 얼마나 더 좋은 조건과 분위기를 갖춰 놓았냐가 기준이 될 뿐 스포츠스타의 존재 여부는 평가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대한민국이 세계에 아직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 제3세계 국가라면 또 모르겠다. 이제 대한민국은 한두 명의 스타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명실상부한 세계 주요국의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우리나라 국격의 향상은 바로 이런 인식 하에서 추구해야 한다. 민주주의 수준을 높이고 사회안전망ㆍ복지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서 국격을 찾자. 학교 폭력을 줄여 꽃다운 나이에 부모의 가슴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 아이들을 줄이고, 홀로 병마에 시달리다 어느날 비참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독거 노인들을 행복한 노후 생활로 인도하는 것에서 국격을 거론하자.
김봉수 기자 bs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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