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5일 밤 글쓴이는 도쿄돔 백스톱 뒤에 마련된 기자석에 있었다. 1995년 11월 제2회 한일슈퍼게임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 찾은 자리. 그곳에선 세계 최고 수준의 야구 국가 대항전인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1위 결정전이 진행됐다. 경기는 한일전이었다. 4만353명의 관중이 거대한 돔구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당시 이승엽은 1-2로 뒤져 패색이 짙던 8회초 1사 1루에서 우중간 담장을 넘어가는 2점 홈런을 터뜨려 한국을 아시아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한국은 이 한 방에 힘입어 일본을 꺾는 기쁨을 누렸다. 아시아 1위 자격으로 2라운드 티켓도 거머쥐었다.
한국은 이날 선발 김선우가 초반 2실점하며 고전했다. 이어 등판한 봉중근, 배영수, 구대성, 박찬호 등은 추가 실점을 범하지 않았다. 이 가운데 5회 초 이병규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따라붙었고 이승엽의 극적인 홈런으로 3-2 역전에 성공했다. 프로들을 포함해 꾸린 대표팀에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3-1로 이긴 이후 가장 짜릿한 일본전 승리였다. 시드니 올림픽 때 한국과 일본은 모두 메이저리거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WBC는 달랐다. 일본의 경우 마쓰이 히데키 등 일부 메이저리거가 빠졌지만 프로들이 대표팀에 합류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알찬 멤버를 구성했다.
경기에선 이승엽의 역전 결승 홈런 외에 기억해 둘 만한 장면이 몇 있다. 한국의 두 번째 투수 봉중근은 0-2로 뒤진 4회 말 1사 2, 3루 추가 실점 위기에 등판,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유격수 땅볼로 유도하며 3루 주자를 홈에서 잡아냈다. 이어 스즈키 이치로를 볼넷으로 걸러 보내 만루가 됐으나 니시오카 쓰요시를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 이닝을 마무리하며 한국의 승리에 디딤돌을 놓았다. 니시오카의 타구는 사실 안타에 가까웠다. 우익선상으로 빠지는 듯했으나 이진영이 전력 질주해 몸을 날려 잡아냈다. 호수비에 도쿄돔에는 한동안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마무리로 나선 박찬호와 이치로의 메이저리거 간 대결이었다. 당시 박찬호는 샌디에이고 파드레스, 이치로는 시애틀 매리너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박찬호는 볼카운트 1-1에서 이치로를 유격수 플라이로 처리한 뒤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경기의 비중을 반영하듯 이날 귀빈석에선 왕세자인 나루히토와 왕세자비인 마사코를 비롯해 일본 야구계의 거물인 나가시마 시게오,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주 등이 경기를 지켜봤다.
한국의 극적인 승리를 지켜보며 선동열 대표팀 투수코치는 도쿄돔에 얽힌 인연을 추억하고 있었다. 1991년 해태 타이거즈의 기둥이었던 그는 한국 프로 선발팀의 일원으로 도쿄돔을 찾았다. 제1회 한일슈퍼게임이었다. 당시 그는 28살의 팔팔한 나이였다. 그러나 국내 경기에서 삐끗한 발목이 좋지 않아 ‘무등산 폭격기’의 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 뒤 선동열은 다시 도쿄돔을 찾았다. 30대 초반의 노련한 투수가 된 그는 제2회 한일슈퍼게임 1차전에서 0-0으로 맞선 9회말 마운드에 올라 1이닝 1안타 무실점의 쾌투를 뽐냈다. 도쿄돔 전광판엔 시속 150km가 여러 차례 새겨졌다. 이땐 시즌이 끝난 지 한 달쯤 지나 몸 상태가 최고 수준과 거리가 멀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일본 관중들은 선동열의 빠른 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선동열은 도쿄돔 호투를 비롯해 그해 한일슈퍼게임에서 맹활약한 뒤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했다. 그리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무등산 폭격기’에서 ‘국보급’ 투수로 거듭났다.
선동열과 이승엽 그리고 한국 야구에 좋은 기억이 있는 도쿄돔에선 다음 달 8일부터 12일까지 제3회 WBC 2라운드가 펼쳐진다. 한국이 대만 타이중에서 벌어지는 1라운드에서 대만, 네덜란드, 호주 등을 제치고 조 1위에 올라 다시 한 번 ‘도쿄돔 대첩’을 이루길 소망한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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