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육 불신 속 입학경쟁 여전 … 경쟁률 6대1 넘는 곳도
[아시아경제 조인경 기자] 5일 오후 서울 시내 L초등학교 지하 강당. 국민의례를 알리는 엄숙한 음악이 울리자 130여명의 학부형들이 일제히 일어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한다. 잠시 후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걸어나와 짧고 유쾌한 인사말을 건넨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를 뽑고 싶지만 이게 학교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니, 혹여 떨어지더라도 그냥 내가 오늘 운이 좀 없었다, 이 정도로만 생각하세요."
잠시 후 이 학교 교장이 단상 위에 올라 학부형들로부터 받은 숫자가 적힌 작은 추첨공들을 네모난 나무상자에 담는다. 상자가 완전히 비어 있는 걸 확인한 뒤 공을 하나라도 떨어뜨릴까 조심조심 옮기더니, 상자 속에 손을 넣어 골고루 섞고 아래위로 흔들어 보이기까지 한다.
제일 먼저 학교 설립자인 노신사가 뽑아 든 번호는 96번. "와~" 하는 탄성과 함께 96번 학부형이 나와 추첨을 이어받는다. 한 학부형이 공 세 개를 고르면, 이 가운데 마지막 번호의 학부형이 나와 또다시 공 세 개를 뽑는 방식이다. 번호 하나가 뽑힐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지고, 하얀 칠판 앞에 선 젊은 남자교사는 호명되는 번호들을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다.
앞뒤로 앉아 있던, 아는 사이로 보이는 두 명의 학부형은 모두 당첨된 모양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너무나 정겹게 인사를 나눈다. 맞벌이 아내를 대신해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내고 왔다는 30대 남성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앗싸, 우리 딸 당첨!"
차분하게 진행되던 추첨이 중반을 넘어서자 사뭇 분위기가 심각해진다. 번호가 불릴 때마다 학부형들의 탄성과 한숨이 뒤섞인다. 기뻐도 크게 환호하지 못하고, 초조해도 애써 침착한 척 한다.
너무 가슴을 졸인 탓일까? 겨우 세 명을 남기고 번호가 호명된 67번 학부형이 다음 번 추첨번호를 뽑기 위해 강단으로 올라서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지 못해 발을 헛디딜 뻔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다음 번호를 호명하고 내려오는 길에는 다른 학부형의 부축까지 받았다.
이같은 공개추첨 방식으로 번호 56개가 뽑혔다. 내년 봄 이 학교에 입학할 1학년 여학생들이 결정됐다.
추첨에 뽑힌 학부형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당첨통지서와 입학승락서, 그리고 수업료 납부고지서가 동봉된 봉투가 전달됐다. 입학금 100만원, 분기 수업료 167만원이 적힌 고지서를 받아든 한 학부형이 말했다. "비싸죠. 다른 데는 더 비싸요. 그런데 회사 다니는 엄마가 아이 공립 보내고, 학원 돌리고, 하교 도우미 부르는 값 비교하면 절대 많은 것도 아니에요."
추첨에 떨어진 한 학부형은 "예상 외로 충격이 크다"고 털어놨다. "여긴 경쟁률도 별로 안높고, 되면 좋고 아니면 말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당첨된 사람들과 섞여 있다 보니 아이에게 뭔가 중요한 기회를 주지 못한 것도 같고…"
1층 교실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리던 일곱 살 아이들은 뭣도 모르고 연신 재잘된다. "아줌마, 우리 엄마도 뽑혔어요?" 추첨에 떨어진 뒤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강당에 남은 이웃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을 챙기던 한 학부형은 마냥 천진한 물음에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같은 시각, 불과 300여m 떨어진 인근 S초등학교에서 아들, 며느리를 대신해 추첨에 참여한 할머니는 아이보다 더 들떠 있었다.
"추첨, 되셨나봐요?" 알은체를 하자 할머니는 누군지도 모르는 기자에게 "네, 됐어요, 됐어. 아이고 감사합니다"라며 허리까지 굽혔다. "이 학교 어떤 점이 그리 좋으세요?"라고 되묻자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시킨대요. 학비 댈려면 우리 아들이 고생 좀 하겠지만 손녀딸이 워낙 똑똑해서요. 요즘은 여자 애들이 더 잘해요, 잘해." 목에 두른 스카프 색상에 맞춰 모처럼 입술 화장까지 한 할머니의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이날 서울 지역 39개 학교를 비롯해 전국의 70개 이상의 사립 초등학교에서 일제히 신입생 추첨이 이뤄졌다. 오전 10시엔 남학생, 오후 2시엔 여학생으로 나뉘어 동시에 진행됐다. 중복 지원은 가능하지만 추첨은 한 곳만 참여할 수 있다. 한 두 곳이 모집정원에 미달됐을 뿐 대부분의 학교가 실질 경쟁률 3대1을 넘었고, 소위 명문으로 꼽히는 서울의 한 사립학교 경쟁률은 6대1 이상으로 전해졌다.
지난 여름부터 관심 있는 학교를 방문해 시설을 살펴보고, 학교마다 입학설명회를 쫓아다니고, 원서를 쓰고, 추첨 현장에 참여하느라 정신 없었지만 6개월 열심히 발품 팔면 앞으로 6년을 마음 편하게 지낼 것 같다는 게 한 학부형의 고백이다.
"어디 회장 손자가 다닌다, 연예인 누구 딸이 입학했다, 요즘 그런 소리 듣고 지원하는 부모 없어요. 이게 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 때문이에요. 꼭 공부 잘하는 거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사교육 덜 시키면서 음악, 체육도 적당히 하고, 심성 따뜻하고 바른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 그거 하나에요. 공립을 보내든, 대안학교를 보내든 부모의 믿음과 가치관의 차이일 뿐이죠. 적어도 우리 아이가 친구들한테 따돌림 당하고, 선생님한테 대들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하잖아요."
조인경 기자 ik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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