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배심원 "시간 없어 건너뛰었다" 고백...배심원 지침도 어긴 것으로 드러나
[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삼성전자-애플 특허전에서 삼성의 완패를 결정한 미국 배심원들이 평결의 공정성에 문제가 있었음을 스스로 고백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평결 과정에서 절차적인 문제들도 속속 드러나면서 '세기의 재판'이 '이상한 재판'으로 전락해가는 형국이다.
28일 외신에 따르면 이번 소송에 배심원으로 참석한 마뉴엘 일라간은 씨넷과의 인터뷰에서 "선행 기술은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 이슈였다"며 "사실 이 이슈에 대한 논의는 건너뛰었다"고 말했다. 배심원 평결이 생각보다 빨라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선행 기술은 아이폰 출시 전에 디자인이 유사한 제품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삼성전자의 핵심 증거다.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법정 증거 채택에서는 기각된 'F700' 등이 해당된다.
일라간의 발언은 배심원들의 평결이 졸속으로 진행됐음을 시인한 것이다. 배심원 평결 직후 외부에서 이같은 문제를 제기한 적은 있으나 배심원이 이를 고백한 것은 처음이다.
배심원장인 벨빈 호건의 '실언'도 논란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의 발언이 배심원 지침(jury instruction)을 위반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호건은 앞서 로이터통신과 인터뷰에서 삼성전자에 10억4939만달러(약 1조2000억원)라는 거액의 손해배상금액을 부과한 이유에 대해 "우리가 보내는 메시지가 단순히 가벼운 꾸지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삼성전자에 충분히 뼈아픈 고통을 주길 원했다"고 설명했다.
배심원 지침은 '손해배상액 책정은 특허권자에게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함으로써 특허권자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특허 침해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호건의 설명대로라면 배심원 지침까지 어겨가면서 삼성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생각이 다분했던 것이다.
특허에 대해 그의 강박적인 태도는 과거 경험과 무관치 않다. 호건은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데 지난 2008년 소송에 휘말려 빼앗길 뻔했다가 가까스로 지킨 바 있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에서도 "처음 이 소송에 관여하게 됐을 때 '만약 내 특허라면 어떨까'를 집중적으로 고민했다"며 "이런 생각을 배심원단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결국 자신의 경험과 이번 소송을 동일시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다.
배심원 평결의 공정성 논란은 이 뿐만이 아니다. 앞서 배심원단은 애플의 특허를 침해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삼성전자의 단말기에도 총 242만달러의 손해배상액을 부과해 오류를 지적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 법률 전문 매체 '그록로우'는 "실제로는 불법이 아닌데도 이를 불법으로 규정한 이상한 평결"이라고 꼬집었다.
정보기술(IT) 전문 매체 씨넷은 배심원들이 주말 요트를 즐길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위해 평결을 조속히 처리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졸속 평결' 논란을 제기했다. 법률 전문 매체 '어보브더로우'도 "이 재판과 관련된 모든 조항을 이해하려면 전문가도 3일 이상 걸린다"며 "배심원단은 혹시 '동전 던지기'를 했는가"라고 비꼬았다.
그록로우는 이 판결이 큰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까지 내놨다.
배심원과 재판장간 손발이 맞지 않는 것도 눈총을 샀다. 배심원단은 루시 고 판사가 심리 대상에서 제외한 세 종류의 스마트폰에 대해 특허 침해 여부를 판단하기도 했다. 해당 제품은 갤럭시 에이스, 갤럭시S-i9000, 갤럭시S2-i9100으로 배심원단은 이들 제품이 특허 침해 모델이라고 표시했다가 뒤늦게 이를 철회했다. 갤럭시S도 손해배상금액으로 4000만달러를 적었다가 '0'으로 수정하는 해프닝도 빚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법원의 배심원 평결이 졸속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배심원단 내부에서 이를 시인하는 발언이 속속 나오고 있다"며 "이번 평결의 공정성 논란이 더욱 가열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해영 기자 rogue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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