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구름이 모여 골짝골짝을 구름이 홀로
백 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 시는 묘하다. 오랑캐는 바로 여진족이고 고려 장군은 윤관(?-1111)이다. 이용악은 고려가 정벌했던 여진족을 떠올리며 애상에 잠긴다.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인 도래샘, 벼처럼 생긴 띠로 엮은 지붕의 띳집, 돌 몇 개를 고아놓은 가마솥인 돌가마, 털로 된 신발인 털메투리. 이것들은 여진족의 일상에 있던 사물이다. 제비꽃의 다른 이름인 오랑캐꽃 앞에서 시인은, 윤관장군에게 쫓겨가던 여진족의 슬픈 삶을 동정하고 있다. 비록 고려가 우리 겨레였고 여진이 이민족이었을망정, 쫓기는 자의 심정은 다 같다는 감정이입이었을 것이다. 마치 슬픈 사람을 껴안아주듯 제비꽃을 감싸며, 실컷 울어나 보라고 말하는, 1947년의 시.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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