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김지현…‘명상의 시학’ 연작
저녁 강가. 가슴에 구멍이 숭숭뚫린 물그림자가 일생을 풀어놓았다. 핑크빛 노을 속으로 미완의 기록들이 소멸했다. 나는 그때 물위에 비처럼 쏟아지는 비애를, 처음 보았다.
실 같은 물꼬가 트였다. 새 길이다. 만삭의 물고기 한 마리가 눈 앞의 냇가에 이르지 못한 채 우물가 숲에 그만 알을 쏟아놓고 말았다. 어미는 주검으로 메마름을 감쌌다. 그러므로 물줄기는 한 생명이 촛불처럼 몸을 태운 헌신에서 비롯됐다.
어린 생명들이 와르르 내로 흘러들었다. 수면(水面)이 번진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갔다. 공중에 날리는 물고기 비늘이 찬란한 한 송이 꽃으로 모아졌다 흩어진다.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 또는 길 떠난다는 것, 보이는 것과 매만져지지 않는데 가슴 아픈 것 그리고 우연한 듯 익숙한 결. 바람은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실어 나르는 것이 임무라며 허망한 표정으로 고백했다.
퇴적의 절벽 아래로 사라졌던 꽃잎들이 기억의 강물위에 떨어진다. 물과 꽃이 만나는 순간, 은하 띠처럼 오묘한 하얀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눈이 부셔 바라볼 수 없는 그때 명랑한 목소리의 첫인사처럼 에메랄드 커플링반지가 언뜻 보였다.
청순의 시절 풋풋한 사랑의 약속인가, 이루지 못한 언약의 세월일까. 수정처럼 투명한 물결에 선명히 아른거리는 초록 순수 이파리들. 아아, 지상을 잇는 잎들의 주인. 순백 원피스를 입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두리번거리며 들꽃을 아름 안은 무명지에 빛나는 저….
물의 노래는 깊은 시간의 공간으로 회향했다. 마음이 열린 길목의 싱그러운 생과일주스를 파는 자작나무 숲 정거장에서 잠시 휴식하곤 꽃의 완전성(完全性)을 만나러 간다며 나그네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하여 그가 진정으로 자기 고독의 장본인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그가 시간을 따지지 않고 우주의 아름다운 측면을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몽상가는 자신 안에서 열리는 어떤 존재를 느낀다.”<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몽상의 시학’>
그러함으로 나는 단순한가, 새로워지는가
장중하다. 불, 물, 공기, 땅. ‘나’의 원형이다. 그러함으로 나는 단순한가, 새로워지는가. 나무에 등을 기댄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다 숲 위 하늘을 바라본다. 참으로 깨끗하고 푸르고 드높다. 적념(寂念)의 흐름. 얕은 강가 조가비에서 고운 무지개색이 물을 뚫고 나뭇잎에 오른다.
위대하다, 몽상가의 눈물 한 방울에 우주를 보았음으로. 그리고 천년의 랑데부에서 돌아온 그대. 이제 겸손한 묵독(默讀)의 시간을 맞이할 때가 왔다!
김지현 작가와의 대화
찰나 혹은 관찰서 포착한 몽환적 풍경 그렸다
담박하게 다가오는 화면에는 나직한 고요가 흐른다. 눈에 보이는 형상과 흐름에 동승한 소리, 촉감, 냄새들은 작품세계의 근간을 이룬다. 자연의 법칙과 변화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관점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의지하는 관념보다 느끼는 자아에 다가서있다. 그러한 인식세계가 펼쳐놓은 찰나 혹은 관찰에서 포착된 촉각적 감흥은 몽상적 풍경을 전한다.
흐릿한,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의 화면은 몸과 의식 그리고 자연에 대한 기억에서 발돋움한다. 또 운필(運筆)과 수묵채색 조화를 통해 저마다 경험적 이미지의 회상, 공감 나아가 또 하나의 기억 생성에 도움이 되게 한다. 작가는 “기억 속 이미지를 자연이라는 매개체로 나타냈지만 단편적인 또는 아련한 기억 속 한 장면들을 그려내고 그것이 관람자의 기억과 교감하는 감성을 표현해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화면의 바탕은 천(cloth)이다. 이것이 고를 때까지 수없이 말리고 우려내는 정련(精練)의 고행 후에야 새벽대지에 맨발로 처음 내딛는 그 서늘한 기운처럼 먹의 번짐을 허락한다. 그러면 허접한 신비로 포장된 통속적 이야기들이 걷힌 천위로 은은히 새싹이 돋아나고 켜켜이 쌓인 한없는 시간의 무늬로 이룩된 자연의 절대성이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절규하며 달려드는 존재에게 각성(覺醒)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한국화가 김지현 작가는 성신여대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2012 대한민국미술대전 비구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가나아트스페이스(서울), 상하이문화원(중국) 등에서 개인전을 8회 가졌다.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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