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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박태준,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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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13일 타계한 청암 박태준(84) 포스코 명예회장(전 국무총리)은 한국을 세계적인 철강국가로 성장시키는 데 공헌한 한국경제의 신화이자 세계의 철강왕으로 불린다.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포스코도 없었을 것이라는 데 그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일제시대부터 6ㆍ25전쟁, 경제성장, 민주화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군인이자 정치가, 리더다.


박 명예회장은 1927년 9월29일(음력)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 기장군 장안읍)에서 아버지 박봉관, 어머니 김소순 사이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 명예회장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성장했다.

1940년 이야마북중학교에 진학해 2차 대전 기간 중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다. 이후 194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합격했지만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54년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국군에 몸을 담아 6ㆍ25전쟁에 참가하고, 5ㆍ16 군사정변에는 박정희 당시 장군을 보좌했다.


1961년 5월 박 명예회장은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비서실장으로 임명돼 한국의 산업혁명을 이끌게 된다. 1964년에는 텅스텐 수출업체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 일년만에 회사를 흑자 기업으로 돌려놨고,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추진과 함께 제철소를 건설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을 받게 됐다.

1960년대 경북 포항 영일만에서 제철소 건설을 진두지휘하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혈세로 짓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에 투신해야 한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경험도, 기술도 없던 시절이다. 세계은행조차 한국에서의 제철소 사업 보고서는 검토할 필요가 없다며 무시했다. 하지만 박 명예회장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1973년 6월 9일 우리나라 최초로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흐르는 역사를 이끌어냈다. 이후 포스코는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 중 하나로 성장했고 자동차, 조선으로 이어지는 한국 경제를 뒷받침하는 강철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1978년 중국 덩샤오핑은 일본 기미츠 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는 답변을 들었다. 한국의 제철소 건립에 대한 부정적 보고서를 썼던 세계은행의 박사는 "박태준이라는 변수를 몰랐기에 틀린 보고서가 됐다"고 말한 일화도 유명하다.


박 명예회장은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정계에 입문해 제 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재무위원장을 역임하고 1988년에는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다. 이후 1990년에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최고의원을 맡기도 했다. 1991년까지 포스코에 몸을 담았던 박 명예회장은 이후 정계에 몸 담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 통합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 시절인 2000년에는 총리를 역임했다. 2008년 6월에는 포스코 청암재단의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박 명예회장은 그간 고령을 감안해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나, 올 들어 지난 5월 K리그 포항스틸야드 팀의 경기를 찾아 관람하고, 9월에는 포항에서 자신과 함께 근무했던 퇴직직원들과 19년만에 재회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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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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