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랫동안 바다는 지구의 역사를 기록해왔다. 해저 퇴적물, 암석, 해양생물 등 바다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시료는 바다의 탄생과 생물진화, 지구환경 변화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십억년 지구 역사의 원초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첨단 분석기술의 발전과 함께 저장고에서 오랫동안 보관 중이던 수십년 전 시료들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지구 역사의 '살아 있는 기록'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지구 환경 변화를 이해하는 데 해양시료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지구 환경 변화를 밝혀낸 과학적 발견은 대부분 해양시료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약 10만년 동안 북미 대륙 빙산이 주기성을 가지고 형성과 붕괴를 반복해 왔으며, 지구 빙하기의 주기적 발생을 증명한 '하인리히 사건(Heinrich eventsㆍ짧은 주기의 빙하기)'은 지구의 기후변화를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바 있다. 이와 같이 해양의 시료는 최근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기후변화가 자연적 범위의 변화인지 혹은 인위적 환경변화인지를 해석하고 미래 기후변화를 예측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해양과학계 전반에 걸쳐 해양시료는 중요한 자료다. 바다에서의 연구 활동은 엄청난 인력과 예산을 필요로 하지만 확보된 해양시료를 보관해 두었다가 관련 연구를 수행하는 해양학자들과 공유함으로써 연구의 효율성을 꾀할 수 있다. 아울러 인류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이전 시료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해양 시료는 마치 도서관에 꽂혀 있는 한 권의 고서처럼 지구 환경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를 알려주는 열쇠인 셈이다.
해양시료의 가치를 일찍부터 감지한 세계 유수의 해양연구기관들은 이미 1960년대부터 특수 설계된 시료보관시설을 구축, 운영해오고 있다. 미국, 일본, 독일 등 해양선진국들은 이러한 해양시료를 관리하고 재활용함으로써 개인 연구자는 물론 다양한 분야의 연구기관에서 중요한 연구 성과들을 꾸준히 창출해 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해양시료를 전문적으로 보관하는 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40년 이상 해양과학 연구 역사를 통해 한반도 주변 해역은 물론 태평양, 인도양 등의 심해로부터 다양하고 방대한 양의 해양시료를 확보해 왔지만 귀중한 시료들이 분실 또는 변질의 위험에 노출돼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곧 우리나라에도 해양조사를 통해 얻은 해저 퇴적물이나 해양 생물 시료를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보물창고로서 국사 연구의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 규장각처럼 해양학의 '사고(史庫)'가 될 해양시료도서관이 내년 5월 한국해양연구원 남해분원에 준공을 앞두고 있다. 총 면적 약 5000㎡, 지상 4층 규모인 이곳에는 해저퇴적물 시료, 해양생물 시료, 해양환경 시료 등 다양한 시료를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특수 설계된 대규모 저장고를 비롯해 연구자들의 기초분석을 지원할 수 있는 비파괴분석실과 실험실, 관람객을 위한 시료전시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한국해양연구원은 해양시료도서관의 운영을 통해 전 세계 바다에서 다양한 연구시료들을 수집해 해양학자에게는 연구의 효율성을, 일반인에게는 가치 있는 해양과학 정보를 제공할 예정이다.
역사가 미래를 위한 '로드맵'이듯 오래된 해양시료는 새로운 연구성과 창출은 물론 해양과학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정보통신, 우주개발, 생명공학과 더불어 '21세기 4대 핵심 분야'로 꼽고 있는 해양개발, 앞으로 해양시료도서관이 수집해 제공할 수많은 해양시료들 속에서 인류의 내일을 이끌 소중한 과학적 발견이 우리의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
임동일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시료도서관기획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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