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세대에게 이와이 슌지는 금지를 뛰어넘는 절실한 이름이었다. 일본 대중문화 유통이 여전히 굳게 닫혀있던 90년대 중반,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1995)는 손에서 손으로 은밀하게 전달되던 비밀의 연서였다. 하얀 커튼이 나부끼는 교실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소년 후지이 이츠키의 모습은 조잡한 비디오 화질을 뛰어넘어 선명하게 반짝거렸고, 설원 위에 울려 퍼지던 애절한 인사말 “오겡끼데스까”는 밀주(密酒)처럼 달콤하게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맞추어 99년 말 정식 개봉된 <러브레터>는 국내에서 14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그 오랜 기다림에 답례를 보냈다.
빛나는 태양, 그 이면의 응달을 비추다
하지만 오해는 여기서 시작된다. 이와이 슌지의 대표 수식어가 되어버린 출세작 <러브레터>는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오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의 영화를 교복 입은 소년 소녀를 내세운 팬시 용품,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의 범주에 묶는 것은 이미 <러브레터>에서조차 합당한 대우는 아니었다. 죽음과 기억을 잇는 정밀한 회로 위에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정서로 배열해내는 그의 치밀한 설계도는, 그저 본 적 없이 부드러운 외피를 두르고 있었을 뿐이다. 물론 <4월 이야기>(1998), <하나와 앨리스>(2004)에서 확인 할 수 있듯, 첫사랑이나 첫 고백이 이루어지던 순간의 공기, 찰나의 떨리는 감정을 담아내는데 있는 이와이 슌지는 비범한 기억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언두>(1994),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1996), <피크닉>(1996)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에 이르기 까지 그의 작품 대부분은 빛나는 태양, 그 이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언두>는 부드럽게 감싸는 사랑의 언어 대신 “좀 더 세게 묶어줘”라는 강박적 요청을 보냈고, 재패니메이션 속 디스토피아를 닮은 <피크닉>은 석양이 지는 세상의 끝의 바다에서 까마귀 깃털을 날리며 죽어가는 소녀의 모습을 느리게 응시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소녀는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자신의 어린 육체를 공중으로 던지고, 키보드 너머 비밀을 속삭이던 소년의 손은 친구의 배를 무심하게 찌른다.
다시 시작된 ‘이와이 월드’의 붉은 초대장
지난 2004년, <언두>부터 <하나와 앨리스>까지 이와이 슌지와 한 몸처럼 움직였던 촬영감독 시노다 노보루가 사망한 이후, 그는 잠시 자신의 작품을 떠나 <무지개의 여신>, <하프웨이>, <밴디지> 등 후배 감독들의 영화를 제작하거나 각본을 썼다. 그 사이 선배 이치카와 곤 감독에 관한 다큐멘터리 <이치카와 곤 이야기>(2006)를 통해 스스로의 근원을 확인하는 성찰의 시간을 거치기도 했고, 옴니버스 영화 <뉴욕 아이러브유>(2009)의 한 조각을 찾아 뉴욕으로 떠나기도 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뮤직비디오 제작사를 거쳐 후지 TV의 <고스트 스프>,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에서 볼까?> 같은 드라마를 연출하며 이름을 알린 이와이 슌지는 최근에는 초기의 행보처럼 AK48 같은 아이돌 그룹의 다큐와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거나, 일본 대지진 이후를 담은 TV 다큐멘터리 < Friends after 3.11 >를 통해 픽션보다 더 드라마틱한 동시대 일본인들의 얼굴을 포착했다. 또한 ‘이와이 슌지 필름 페스티벌’ 사이트를 운영하고 적극적인 SNS활동을 통해 진짜 소통의 방법을 찾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역할, 장르, 창구를 오가며 이와이 슌지가 스스로의 효용과 가치를 확인하는 동안, 많은 팬들은 ‘영화감독 이와이 슌지’에 대한 또 한 번의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7년 만에 ‘이와이 월드’로 부르는 붉은 초대장이 도착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는 장편 극영화 <뱀파이어>는 도시의 태양 아래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외로운 생존기다. 똑.똑.똑. 마침내 고인 피가 흐른다. 부산으로 가자. 그리고 이와이 슌지를 마시자.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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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백은하 기자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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