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흘 사이 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현장 기자 시절 가깝게 지냈던 장효조, 최동원 두 프로야구 스타플레이어가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내세에 대한 생각은 종교나 민족 등 여러 요인으로 서로 다를 것이다. 하지만 먼저 떠난 이들이 저승에서 이승보다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빈다.
1981년 12월 11일 한국프로야구위원회(KBO, 당시는 기구 이름에 프로가 들어 있었다)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렸을 때 내건 목표는 “어린이게는 꿈을, 국민들에게는 건전한 여가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서종철(작고) 초대 총재가 취임사를 통해 직접 내용을 밝혔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가 ‘내셔널 패스타임(National Pastime)’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걸 의식하고 내건 슬로건이었다.
취임사를 작성한 이는 김창웅 KBO 초대 홍보실장이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으로 경향신문, 서울신문 기자를 지낸 김 실장은 편집기자 출신이었지만 야구에 해박했다. 그는 뒷날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 전문 주간지인 ‘주간 야구’를 창간했다. 아무튼 프로야구 초창기 KBO 사무국 직원들은 철저하게 마케팅 중심의 정신으로 무장했다. 서 총재도 경기장에 갈 때는 직접 입장권을 구매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본다. 1960, 70년대 동대문운동장 1루 매표소 앞에는 ‘남성 관객과 동반하는 여성은 공짜’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는 경우가 이따금 있었다. 물론 고교야구 대회는 아니고 대학야구 또는 실업야구 대회가 열릴 때였다. 어느 프로구단 통계에 따르면 최근 특정한 날 여성 관객이 40% 정도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1960, 70년대 동대문운동장의 안내문은 미래 고객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성 관객이 많으면 자연스레 남성 관객이 늘고 여성 관객은 2세(자녀) 관객의 출발점이라고 내다봤다.
어쨌거나 프로야구는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위상을 다지며 건전한 여가 수단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KBO는 지난 13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과 롯데의 경기 입장권 1만 장이 모두 팔리는 등 이날 4개 구장에 6만1천264명의 관중이 입장해 올 시즌 누적 관중 605만7천542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야구는 거의 매일 경기를 한다. 축구, 농구, 배구 등 경쟁 종목에 비해 관중 동원에서 이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 시즌 600만 관중은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처음이거니와 꽤 의미 있는 기록이다. 프로야구보다 출범이 한 해 늦은 프로 축구의 한 시즌 최다 관중 기록은 2008년 294만5천400명이다.
프로야구는 지난 10일 누적 관객 593만1천698명으로 지난해 세운 역대 최다 관객 기록(592만8천626명)을 갈아치웠다. 계속된 상승세는 아니다. 프로야구는 1995년 처음으로 500만 명을 돌파했다. 그 뒤로 성적은 2000년대 중반까지 들쭉날쭉했다. 2004년에는 233만 명까지 추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410만 명을 기점으로 2008년 525만 명, 2009년과 지난해에는 2년 연속 592만 명을 유치하는 등 3년 연속 500만 명을 야구장으로 끌어들였다.
최근 야구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이유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9전 전승으로 얻은 금메달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등 국제 대회에서 거둔 좋은 성적 때문이다.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은 하나 더 있다. 익사이팅 존, 바비큐 존, 가족석 등의 설치와 각종 이벤트다. 각 구단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날이 갈수록 효과를 보고 있다. 프로 스포츠도 매출을 올려야 하는 산업이다. 마케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마케팅 활동 이전에 오늘날 프로 야구가 국민적 여가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지난 열흘 사이 타계한 장효조, 최동원과 같은 1980년대 프로 야구 개척자들의 노력 덕이 컸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흥행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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