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도형 기자]인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장르가 바로 소설(小說)이다. 소설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과정을 통해서도 창의력의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는 얘기다.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을 받은 당대의 소설가 김훈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창의력의 근원으로 '관찰과 체험'을 이야기했다.
지난 15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 김덕윤예배실에서 열린 인문학 포럼에서 '소설적 상상력과 인문학'을 주제로 강연한 김 작가는 "나는 그렇게 뛰어난 상상력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상력이 영감이라고들 하는데 나는 영감이라고 할 만한 순간이 없었어요."라고 말했다. 자신에게는 기발한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고백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힘으로 소설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일까. 그에게는 세심한 관찰과 체험이 거의 유일한 소설적 상상력의 근원이었다.
김 작가는 강연에 앞서서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을 둘러봤다고 말했다. 그는 "신석기ㆍ구석기 시대의 자료들, 도저히 해석이 안 되는 미세하고 정교한 무늬를 그려놓은 청동기들을 보면서 수천 년 동안 돌도끼를 들고 약육강식의 들판을 헤매던 남자들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설명했다. 오래된 돌칼의 손잡이가 손길의 흔적에 따라 닳은 모습을 보면서 오랜 세월을 건너서 인간의 생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도 마찬가지다. '칼의 노래'를 쓰면서 김 작가는 아산 현충사를 여러 번 찾아 충무공의 칼을 들여다봤다고 했고 '현의 노래'를 쓰면서는 서초동 국립국악원의 악기박물관을 자주 찾아 기웃거렸다고 했다.
가장 최근작인 '내 젊은 날의 숲'을 쓰기에 앞서 그는 "민통선 안쪽 최전방 지역을 여러 차례 여행했다"고 밝혔다. 이 소설의 배경은 민통선 안쪽의 고원과 수목원이다. 결국 소설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몸으로 현장을 느끼고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면서 소설적 상상력을 스스로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날 김 작가는 이 같은 '창의'의 과정을 청중들에게 바로 들려주기도 했다. 그는 고래 잡는 그림이 그려진 울산 반구대 암각화 얘기를 하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수천 년 전의 사회를 재생해 냈다.
그는 "울산에서 고래를 작살로 찍어 잡아내는 사내들을 그린 암각화를 봤다"며 "고래잡기는 매우 힘든 일인데 배 20척이 나가서 고래를 에워싸고 매우 근접한 후에 노련한 작살잡이가 작살을 던지고 고래에게 끌려가다가 나중에 끌어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암각화 관찰을 통해 고도의 훈련과 정치적 리더십을 갖추고 기술과 산업으로 고래를 잡는 시스템이 신석기 시대 그 주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해 낸 것이다.
이 같은 상상이 바탕이 된다면 단순하게만 여겨지는 신석기 시대가 사실은 복잡하고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사회였음을 말하면서 새롭고 창의적인 이야기를 충분히 그려낼 법하다.
막연한 발상보다 '관찰과 체험'에 근거하는 그의 이같은 '상상력론(想像力論)'은 전문가들의 견해와도 서로 통한다. 이정규 한국과학창의재단 책임연구원은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새롭고 엉뚱한 아이디어'라는 오해가 많다"면서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서의 오랜 노력과 풍부한 지식도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김도형 기자 kuer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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