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IBS의 신입 PD로 입사한 베키(레이첼 맥아덤즈)는 번듯한 학벌도, 내세울 경력도 없다. 그런 베키를 방송사가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집에 리모컨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간호사가 채널 바꿔주기만을 기다리는 환자들이나 보는” 시청률 바닥의 아침방송 <데이 브레이크>를 수습할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이다.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선장이 되어 함께 죽을 것인가, 아니면 회생의 기적을 보여줄 것인가. 가진 건 패기밖에 없는 여자 베키는 미국 방송사의 전설로 기록된 앵커 마이크(해리슨 포드)를 새 진행자로 기용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수많은 특종을 거머쥐며 피바디상 8번, 에미상을 16번이나 수상한 전설의 앵커 마이크. 하지만 왕년에 어마어마했던 경력과 상관없이 현재 그에 대한 후배들의 평판은 “김정일, 신데렐라 계모 다음으로 사악한 남자”일 뿐이다. 무식하고 천박한 요즘의 방송을 냉소하며 사냥이나 즐기며 편히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아침방송을 진행해달라며 한 여자가 찾아온다. 방송사와의 계약상 베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마이크는 결국 시청률을 높이지 않으면 6주후 폐지될 운명에 놓인 이 난장판 모닝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딛는다.<#10_LINE#>
나는 방송이다
3월 17일 개봉하는 <굿모닝 에브리원>은 로맨틱 코미디의 부드러운 외양을 하고 있지만 곳곳에 꽤나 날카로운 화두를 숨겨놓은 영화다. 신참 PD는 가진 게 너무 없어서 위태롭고, 늙은 앵커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위태롭다. 젊으나 늙으나 방송 프로그램이나, 어쨌든 끝나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서바이벌’은 힘들고 어려운 문제다. 영화의 큰 축인 베키와 마이크는 젊음과 늙음, 연성과 강성, 가벼움과 무거움의 극단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시대와 성별을 달리한 워커홀릭의 도플갱어다. 결국 “뭔 짓을 하건 시청률만 올려봐”라는 상부의 명령이 제 아무리 저열하다해도, 베키가 자신의 롤 모델이었던 마이크를 아침방송 스튜디오로 불러온 것은 그를 조롱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던 것은 마이크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해 대중 앞에서 망가지고 물러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역으로 건재함을 증명시키는 순간이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살기 위한 선택. 어쩌면 방송의 윤리라는 건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한 시대를 이끌었던 사람이라 해도 세상은 언제까지나 그들에게 프라임타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마이크처럼 살아서 만개하고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때로 스스로 낙화의 풍경을 은닉하거나, 지난 명예를 베고 더 이상 호흡을 내뱉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완벽한 기억에 흠집 나는 것이 두려워 ‘전설’이라는 수식을 덮어 그들을 매장시키는 순간이다. ‘존경’을 내세워 더 이상 그들이 살아있음을 ‘존중’하지 않을 때다. 베키는 밤의 무덤 속에서 자위하던 자신의 우상을 깨운다. 그리고 살아서 함께 아침을 맞이한다. 굿모닝 에브리원. 이제 무덤 앞에 놓인 꽃다발을 치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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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백은하 one@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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