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선사 모두에게 선가 줄이고 생산효율 높여 ‘윈-윈’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한 때 자동차 업계에는 ‘월드 카’(World Car)라는 개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자동차 업계가 다국적·글로벌화하면서 공동개발, 공동부품, 하나의 기본설계를 한 후 목표시장의 상황에 맞게 외형과 내장을 달리한 차를 월드 카라고 불렀다.
지난 1974년 제1차 석유파동(오일 쇼크) 이후 미국 포드사가 연료절약형 ‘피에스타’를 ‘에스코트’로 명칭을 변경해 전 세계 포드 자회사들이 생산한 부품을 조립해 미국 시장에 내놓았는데, 이것이 월드카의 시초다.
이후 포드, 다임러크라이슬러, 제너럴모터스 등 미국 빅3가 중심이 되어 일본의 소형차에 대응하기 위한 월드카 생산이 계속되었지만 거듭 실패하자 결국 일본 업체, 나아가 한국 자동차 회사들과 손을 잡았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제너럴모터스의 새턴 시리즈, 포드의 몬데오, 포드-대우의 르망, 포드-기아의 프라이드 등이었다.
월드 카들은 기본 외형은 그대로 둔채 국가별로 다른 이름을 붙인 쌍둥이 형제다. 이러한 쌍둥이 들은 자동차 이외에도 휴대전화 등 소형 가전제품에서 원자력 발전소 등 대규모 플랜트까지 다방면에 걸쳐 존재한다.
한편, 조선업계에서도 월드 카와 비슷한 개념이 존재하는데 이를 ‘시리즈 선박’이라고 칭한다. 시리즈 선박이란 같은 선형(船型)의 배를 동시에 여러 척 발주하는 것을 말한다.
시리즈 선박이 나온 이유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선박이 대형화 하고 첨단 기술이 적용되면서 한척의 선박을 건조하는데 드는 선가는 매우 비싸게 정해진다. 이는 선박을 구입해 운용하는 선사는 물론 수주 때마다 새로운 선박을 설계해야 하는 조선사로서도 부담이다.
따라서 조선사가 선사가 필요로 하는 중·장기 선박 시장을 미리 예측해 그에 맞는 선박을 설계하고 이 등급의 선박을 수 척 이상 수주할 경우 한 척의 선박만 건조할 때에 비해 대량의 원자재 조달 및 인력의 장기적 활용 측면 등에서 그만큼 가격을 떨어뜨릴 수 있어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할 수 있고, 선사도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선박을 얻을 수 있어 상호간에 윈-윈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특히 가공화물을 신속히 운송해야 하는 컨테이너선의 경우에는 시리즈 선박이 대세다. 화물 물동량이 가장 많은 태평양이나 대서양 등 먼 항로에 투입되는 컨테이너선이 제때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최소 8~9척이 필요한데, 선주들은 초대형 컨테이너선을 시리즈로 발주하는 방법으로 운임단가를 떨어뜨리려 애쓰고 있다.
생산측면에서도 작업 숙련도가 높아지고 오작(誤作)을 줄일 수 있으며 인플레나 환율 변동, 원자재 가격 상승 등 각종 리스크(Risk)에 대비할 수도 있다. 즉, ‘일란성 쌍둥이’격인 시리즈 선박은 시간·돈·품질·인력·운용 등 모든 면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 조건임에 틀림없다.
조선업계에서는 현재 국내 조선소들이 수주해 놓은 선박의 90% 이상이 4~9척의 ‘쌍둥이 형제’들이라고 한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은 지난 2008년까지의 조선업계 호황기는 물론 2010년부터 본격화 된 회복기에 이러한 시리즈 선박을 통해 대규모 수주 실적을 거뒀다.
성동조선해양과 SPP해양조선 등 중견 조선사들도 시리즈 선박의 수혜를 입은 업체들이다. 이들 중소형 조선사들은 특정 부문에 역량을 집중해 생산과 선박 운용 측면에서 가장 효율성 있는 표준선형을 설계함으로써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파고들고 있는 중국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수주고를 올리고 있다. ‘잘 키운 딸 하나가 열 아들 안부럽다’는 말이 조선업계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물론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후반까지 주기적으로 계속된 조선 해운시장의 극심한 불황기에는 요즘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 수개월 째 한 척도 수주하지 못하고 빈 도크(dock)를 바라봐야만 했던 시절, 영업맨들에게 시리즈 선박이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호사였다.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으로 입지를 굳힌 한국이 향후에도 이러한 위치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바로 부문을 대표하는 ‘표준선형’의 성공 사례를 전체에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자료: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성동조선해양>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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