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생활을 하다보면 향수병에 시달리는 친구들을 볼 때 있다. 그만큼 타지에서 생활하다 보면 외롭고 힘들다. 나 역시 향수병에 걸린 적 있다. 하지만 내 경우엔 다소 달랐다. 한국에서의 생활이 그립다기 보단, 안전한 한국의 '치안'이 그립다고 하는 게 맞겠다. 남아공의 '몹쓸 치안'은 지난 2005년 탤런트 김태희가 이곳에서 화보촬영 중 5인조 강도에게 습격 받으면서 한국에서도 유명해졌다.
남아공은 어딜 가나 '조심 또 조심'이다. 가급적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다니고, 현금은 항시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다니는 게 일상이다. 차를 주차할 때는 옷가지나 CD플레이어 등은 모두 빼놓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주차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창문을 부숴버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강간· 성폭행도 성행한다. 이런 일들이 버젓이 대낮에도 벌어진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이런 사건· 사고가 발생해 누군가 살해당한다 해도 웬만해서 뉴스거리도 안 된다는 것. 너무 사건이 잦다보니 사람들이 '범죄 불감증'에 걸려버린 것이다.
경찰에 대한 신뢰도는 최악이다. 최근 겪은 일이다. 내가 살고 있는 케이프타운의 'KFC'에 강도가 난입해 손님들을 총으로 위협하고 돈을 갈취해 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 정도면 그냥 흔하디흔한 '강도사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KFC 바로 옆이 경찰서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더 웃긴 것은 이 강도가 일주일 뒤 이곳을 다시 찾아와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지난해엔 대통령궁에 도둑이 침입해 지붕에 설치하고 있던 '알루미늄(한화 약 400만원 상당)을 훔쳐가는 '전대미문의 사건'도 발생했다. 한국으로 치면 청와대에 도둑이 들어와 지붕을 뜯어간 셈이다. 이 정도면 코미디에 가깝다.
차를 도난당한 친구와 나눴던 짤막한 대화는 어이없다 못해 씁쓸하다. 친구는 차를 도난당한 뒤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했다. 친구에게 우스갯소리로 "경찰이 차를 찾아줄까?"라고 물었을 때 친구로부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친구는 "경찰이 차를 찾아줄 거라고 생각해서 신고한 게 아니야. 보험금을 타려면 사건 접수번호가 필요했거든"이라고 말했다.
최근 KBS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서 남아공 출신 브로닌이 "남아공에선 운전할 때 절대 규정 속도를 지켜선 안 된다"고 한 적 있다. 무슨 얘기일까. 남아공에선 야간 운전을 할 때 항상 문을 '잠금 상태'로 놓는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도 건너편에서 오는 차가 없으면 그냥 신호를 무시하고 달린다. 이것이 사는 길이다. 신호대기 중인 차량에 강도가 들이닥쳐 갑자기 차 유리문을 부수고 금품을 갈취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신호위반으로 경찰에 잡힌다 해도 "안전을 위해서 그랬다"고 대답하면 그냥 보내주기도 할 정도다.
이런 나라에서 몇 개월 뒤에 월드컵을 유치한다니 걱정이 앞선다. 정부에선 부랴부랴 경찰과 치안 인력 4만 명을 증원하는 등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상황. 실제로 요즘 시내를 나가보면 예전보다 많아진 경찰을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서 괜히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치안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미리 경찰을 늘렸으면 좋았을 텐데….'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그나마 지금의 경찰 증원도 없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월드컵 개최 여부를 떠나 국민들에게 안전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남아공 정부는 '망각(忘却)'하고 있는 것 같다.
글= 이정일
정리= 윤종성 기자 jsyoon@asiae.co.kr
◇ 한국에서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하던 이정일 씨는 1년간 아프리카 짐바브웨 자원봉사를 마친 후 아프리카의 매력에 이끌려 다시 아프리카로 향했다. 상업광고와 영상편집에 관심이 많아 현재 남아공 케이프타운 CPUT(Cape Peninsula University of Technology)에서 멀티미디어를 전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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