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프로그램 통한 한시적 공급.. 시민단체 "눈가림" 비판
정부가 정해준 약값이 너무 싸다며 5년 동안이나 약 공급을 거부해오던 다국적제약사가 갑자기 약을 무료로 나눠주겠다고 선언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스위스계 제약사인 한국로슈는 최근 "동정적 프로그램(EAP, Expanded Access Program)을 통해 에이즈치료제 푸제온을 한국 환자들에게 무료 지원한다"고 밝혔다. 희귀 질병을 앓는 저소득 국가 환자에게 제약사가 무료로 약을 공급하는 사업을 말한다.
프로그램 실시 배경에 대해 로슈측은 "한국에서 보험 혜택을 받는 약품으로는 공급이 불가하기 때문"이라고 공식 보도자료를 통해 밝혔다.
그간 이 회사가 '특허에 대한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라'고 정부와 환자들에게 요구하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시민ㆍ환자단체는 "일종의 편법으로 보인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우선 강제실시권 발동이 임박한 데 따른 위기감 때문이란 해석이다.
지난 해 12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이하 건약) 등 시민단체는 강제실시권 발동을 특허청에 청구한 데 이어, 올 3월에는 '3년 이상 불충분실시'라는 명목으로 또 한번 발동을 요청할 예정이었다.
'3년 이상 불충분실시'는 강제실시권 발동 요건 중 하나로 3년 이상 국내에서 약이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정부측에 강제실시를 요청할 수 있다. 특허청이 이를 받아들이면 푸제온의 특허는 무시되고 누구나 약을 만들어 팔 수 있게 된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강제실시권 발동만은 막아야 겠다고 판단한 로슈측이 약공급을 전격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건약측은 바라봤다.
이 단체 강아라 사무국장은 "특허권을 생명처럼 여기는 제약회사 입장으로선 강제실시권에 대한 부담이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가지 가능성은 로슈가 향후 정부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도다.
동정적 프로그램 실시와는 무관하게 정부와 로슈의 약값 협상은 계속될 것인데 향후 협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가격을 인정하지 않으면 동정적 프로그램을 중단하겠다"는 식의 주장을 펼 공산이 크다는 분석이다.
현재까지 협상에서 정부는 개당 2만 5000원 선, 로슈는 3만원 미만 공급 불가라는 입장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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