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화기자
암은 우리 몸 안에서 자란다. 면역세포와 끊임없이 마주치지만, 많은 경우 암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증식한다.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은 단순하다. "면역계는 왜 눈앞의 암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최근 국제 연구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자 수준에서 하나씩 풀어내고 있다. 암세포가 면역 감시를 피해 살아남는 '면역 회피 전략'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췌장암 복강경수술을 진행 중인 의료진. 아시아경제DB.
대표적인 난치암으로 꼽히는 췌장암은 면역치료에 잘 반응하지 않는 암이다. 최근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교(University of Wuerzburg)를 중심으로 한 국제 공동 연구진은 췌장암 세포가 면역 경보 신호 자체를 차단하는 분자 메커니즘을 이용해 면역계를 속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번 연구에는 레오니 울(Leonie Uhl), 아멜 아지바(Amel Aziba), 지나 뢰버트(Sinah Lobbert) 등이 주저자로 참여했으며,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셀(Cell)에 게재됐다. 연구진은 췌장암 세포가 특정 분자 경로를 통해 면역세포가 암을 인식하는 초기 신호를 무력화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동물실험에서 이 경로를 차단하자 면역세포가 다시 암세포를 인식했고, 종양이 빠르게 붕괴되는 현상이 관찰됐다. 연구진은 "암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면역계가 암을 '보게' 만드는 것이 치료의 핵심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 연구팀도 최근 췌장암 세포가 당(糖) 기반의 은폐 신호, 이른바 '설탕 코팅'을 이용해 면역세포의 공격을 피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 연구를 이끈 모하메드 압델-모센(Mohamed Abdel-Mohsen) 교수는 "암세포 표면의 당 구조가 면역세포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 공격을 차단한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 은폐 신호를 제거하는 실험용 항체를 개발했고, 동물 모델에서 T세포와 자연살해(NK)세포의 암 공격이 다시 활성화되는 결과를 얻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 픽사베이 제공
압델-모센 교수는 "이번 연구는 췌장암이 면역치료에 저항해온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라며 "항체 기반 접근법은 기존 면역관문억제제와는 다른 새로운 치료 전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암의 면역 회피는 세포 표면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루드비히 암 연구소(Ludwig Institute for Cancer Research) 연구진은 비타민 A 대사체가 면역세포 기능을 약화시켜 암 성장을 돕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에 따르면 비타민 A의 특정 분해 산물은 면역세포의 활성 신호를 억제하고, 암 백신이나 면역치료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반대로 이 대사 경로를 차단하자 면역 반응이 회복되고 종양 성장 속도가 감소했다. 암의 면역 회피가 신진대사 환경과도 깊이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최근 연구자들은 암의 면역 회피 전략을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위장(camouflage), 억압(coercion), 세포 보호(cytoprotection)다.
암세포는 정상 세포처럼 위장해 면역의 시선을 피하고, 면역세포의 기능을 직접 억제하며, 저산소·영양 결핍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동시에 가동한다. 단일 치료법으로 암을 제압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때문에 면역관문억제제, 항체 치료, 암 백신, 세포 치료(CAR-T·CAR-NK), 대사 조절 전략을 복합적으로 결합하는 다층 치료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최근 잇따른 연구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암을 직접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면역계가 암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 즉 암이 스스로를 숨기기 위해 구축한 은폐 전략을 하나씩 해체하는 과정이 치료의 핵심 전선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직은 동물실험과 초기 연구 단계가 대부분이지만, 과학자들은 이 접근이 췌장암을 비롯한 난치암 치료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 않았던 암. 이제 과학은 그 망토를 벗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