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종에너지 스페셜리스트
삼성전자 영국법인은 2023년부터 영국 옥스퍼드시와 함께 '클린 히트 스트리트(Clean Heat Streets)'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옥스퍼드시 로즈힐 지역에 히트펌프를 보급해 탄소 배출을 줄이는 사업이다.
옥스퍼드시는 영국 정부의 목표보다 10년 앞선 2040년까지 탄소 순배출 제로 도시를 달성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탄소 배출의 60%를 차지하는 건물의 냉난방을 히트펌프로 교체하고 있다. 옥스퍼드시와 삼성전자는 3만대 이상의 공기열 히트펌프를 보급할 계획이다.
영국 중앙 정부 차원에서도 히트펌프 보급에 적극적이다. 영국 정부는 2022년 5월부터 보일러 업그레이드 스킴(Boiler Upgrade Scheme·BUS)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존 화석 연료 기반의 보일러를 히트펌프로 전환하면 보조금을 지급한다.
영국 에너지 규제기구인 오프젬(Ofgem)의 발표에 따르면 2025년 3월까지 4만9136건에 3억2820만파운드(약 6519억원)의 보조금이 지급됐다. 이 중 97%는 공기열 히트펌프였다. 영국 정부는 2028년까지 연간 60만대의 히트펌프를 보급하는 것이 목표다.
영국 국민의 히트펌프 도입은 해마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영국 에너지안보탄소중립부(DESNZ)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까지 영국 내 히트펌프 신규 설치 수는 3만5387건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도 같은 기간(3만1819건)에 비해 11% 상승한 것이며 2023년 동기(2만142건)에 비해서는 76% 많은 것이다.
가정용 히트펌프 구성 개념도. LG전자
영국뿐만이 아니다. 이미 유럽의 여러 국가는 건물 탄소중립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히트펌프 도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유럽히트펌프협회(EHPA)에 따르면 2024년 기준 노르웨이는 1000가구당 히트펌프 설치 대수는 632대에 달해 유럽국가 중 가장 높은 보급률을 기록했다. 이어 핀란드가 1000가구당 524대를 나타내 2위였으며, 스웨덴 496대, 에스토니아 351대, 덴마크 217대, 프랑스 204대 순이었다. 2024년까지 유럽 19개국에 설치된 누적 히트펌프 대수는 2550만대로 집계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50 넷제로 로드맵'에서 2050년까지 난방 수요의 약 55%를 히트펌프가 대체할 것으로 전망했다. 히트펌프 설치 대수는 2020년 1억8000만대에서 2030년 6억대, 2050년 18억대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히트펌프를 주목하는 것은 기존 화석 연료 기반의 보일러를 재생에너지 기반의 히트펌프로 전환할 경우 건물의 탄소중립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 탄소중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는 난방 등 열에너지를 친환경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 전체 에너지 소비 중 열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48%로, 수송(27%), 전기(21%)에 비해 매우 높다. 에너지 부문 탄소배출 중 열에너지의 비중도 29.2%에 달한다. 그동안 열에너지는 화석연료를 통해 얻었으나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이를 친환경 열원으로 전환해야 한다.
히트펌프는 대표적인 친환경 열원 기술이다. 히트펌프의 기본 원리는 열교환기를 통해 실내와 실외의 열을 맞바꾸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겨울에 외부에서 열을 추출해 내부로 전달해 건물을 난방한다. 반대로 여름에는 건물 내부의 열을 추출해 외부로 전달하는 식이다. 이때 열원으로 공기열, 지열, 수열이 활용되는데 가장 일반적인 유형이 공기열 히트펌프다.
히트펌프의 작동 원리. 기후에너지환경부
히트펌프는 증발기(실외기), 압축기, 응축기(실내기), 팽창밸브로 구성된다. 겨울철에는 실외에 설치된 증발기를 통과하며 냉매가 기화된다. 기체로 변한 냉매는 압축기를 거치며 온도가 올라간다. 뜨거워진 냉매는 응축기를 거치며 실내의 온도를 데우게 된다. 열을 빼앗긴 냉매는 차가워지면서 액체로 변한다. 액체 상태의 냉매는 팽창밸브를 통과하며 급격히 온도가 떨어진다. 실외 온도보다 더 차가워진 냉매는 실외기를 거치며 열을 받아 다시 기화한다.
히트펌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어느 정도 전력 공급이 필요하다. 냉매를 응축하거나 팽창할 때 외부로부터 전기를 공급받아야 한다. 하지만 자연의 열원을 이용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전기의 양은 많지 않다.
히트펌프의 효율성은 성능계수(Coefficient Of Performance·COP)로 나타낸다. 예를 들어 히트펌프의 성능계수가 4라면 열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전력보다 생산하는 열에너지의 양이 약 4배 더 많다는 의미다. 공기열 히트펌프의 성능계수는 3.0~3.5, 지열 히트펌프는 최대 4.8, 수열 히트펌프는 최대 6.0으로 알려져 있다.
히트펌프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력을 재생에너지로 활용한다면 온실가스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완전한 탄소중립형 기술이 될 수 있다. 화석연료 기반의 전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존의 가스보일러 대비 에너지 효율이 높은 것은 분명하다. 히트펌프를 열에너지의 탈탄소 핵심 기술로 보는 이유다.
우리나라의 건물 열에너지는 그동안 도시가스와 지역난방 위주였다. 2020년 국가통계포털의 주택 유형별 난방 현황 자료를 보면 도시가스 보일러가 67%로 가장 높고 지역난방(15.2%), 기름보일러(8.8%), 중앙난방(3%), 전기보일러(2.7%), 액화석유가스(LPG) 보일러(2.4%)의 순이었다.
히트펌프는 가스보일러나 지역난방에 비해 설치비용이 높고,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적용에 대한 부담으로 보급이 더디게 진행됐다. 히트펌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본체 외에도 축열조를 위한 별도의 공간도 필요하다. 그동안 국내에는 히트펌프를 위한 인센티브가 없었다. 또한 공기열을 재생에너지로 인정하지 않아 공공기관의 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 제로에너지건축물(ZEB) 인증에 활용되지 못했다.
새 정부 들어서는 분위기가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해 12월16일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회의 겸 성장전략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 '히트 펌프 보급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다. 새 정부는 2035년까지 히트펌프 350만대를 보급해 온실가스 518만t을 감축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도시가스가 보급되지 않는 지역을 대상으로 히트펌프를 우선 보급할 계획이다. 태양광이 설치된 단독 주택이나 마을 회관 등 공동 시설에 태양광과 히트펌프를 함께 설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노인 요양보호소 등 취약 계층이 거주하는 사회복지시설에 히트펌프 설치를 지원하고 화훼 등 시설 재배 농가에서 히트펌프를 난방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목욕탕, 수영장 등 난방 및 급탕 수요가 높아 에너지 소비가 많은 업종을 대상으로 히트펌프 설치비 보조와 장기 저리 융자 지원을 확대한다. 학교, 청사 등 공공시설에 히트펌프, 태양광 설비, 에너지저장장치(ESS)를 결합한 건물 자립형 히트펌프 보급도 확대한다. 2027년부터는 히트펌프 장기 분할 상환요금제(일종의 구독 서비스)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이와 함께 기후부는 공기열을 재생에너지 종류 중 하나로 포함할 수 있도록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 이용보급 촉진법' 시행령 개정도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일본,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공기열을 재생에너지로 인정하고 있다.
기후부는 히트펌프에 대한 법적 지원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에너지이용합리화법상 고효율에너지 기자재 관련 고시에 '가정용 공기-물 히트펌프'를 추가하는 개정도 추진한다. 또한 가정용 히트펌프 전기요금제를 마련해 소비자들의 전기요금 부담을 완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국내 히트펌프 관련 산업도 활성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에는 삼성전자, LG전자, 대성히트에너시스, 센추리, 오텍캐리어, 경동나비엔 등 20여개 업체가 히트펌프를 제조 및 수입하고 있다.
2022년 기준 공기열원 히트펌프의 국내 판매량은 36만여대 수준이었다. 한국에너지공단이 2024년에 발간한 '대용량 히트펌프 도입을 위한 인증 기술 기준 연구'에 따르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평균 성장률 26.7%를 2030년까지 적용할 경우 국내 히트펌프 판매량은 연간 240만대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기후부는 "고효율 히트펌프는 우리 기업이 제조 및 생산 기반을 갖추고 있어 현실적인 탈탄소 방안인 동시에 수출력 신성장 동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히트 펌프 보급이 설계, 시공, 배관, 유지관리 등 중소기업 성장과 내수 확대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부의 히트펌프 보급 사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국내 사정상 히트펌프가 제대로 자리 잡기까지 여러 난관이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가격이다. 히트펌프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가구당 축열조 포함 약 1000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한다 해도 자부담 비용이 수백만 원에 달한다. 가스보일러 설치비용이 100만~200만원인 점과 비교하면 부담스러운 액수다.
기존 이해 관계자들도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공기열을 재생에너지에 포함하기 위해 정부가 지난해 12월3일 입법 예고한 신재생에너지법 시행령 일부개정안에는 1800개가 넘는 반대 의견이 달렸다. 이달 13일에는 한국지열협회 등 관련 업계가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공기열을 재생에너지로 지정하려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13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한국지열협회 등 관련 업계가 공기열 히트펌프의 재생에너지 포함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6.1.13. 대한기계설비건설협회
이들은 "재생에너지는 태양, 풍력, 수력, 지열 등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1차 에너지를 의미한다"며 "화력발전 위주의 우리나라 환경에서 공기열 히트펌프를 재생에너지로 지정하는 것은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김소희 국민의힘 의원도 21일 "공기열 히트펌프는 전기를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설비이고 특히 혹한기에는 다량의 전력 소모가 필요하다"며 "아직 재생에너지 비중이 10% 수준에 불과한 우리나라에서 전력 소비를 크게 늘리는 설비 보급을 무작정 밀어붙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저탄소 전환이 아니라 배출 증가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기후부 관계자는 "성능계수를 고려해 히트펌프를 통해 추출된 공기열 중 재생 가능한 부분만 재생에너지로 인정할 것"이라며 "바닥 난방을 선호하는 국내 주거 문화를 고려해 한국형 가정용 고효율 히트펌프 인증기준(KS 인증)도 마련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