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 굽는 타자기] 그래 현실이 사이다일리가 있나

왕후민 작가 '내 입으로 나오는 말까지만 진짜'
여섯 편의 단편을 공간을 통해 연결
시원한 결말도 권선징악도 없는 진짜 현실 그려

영화라는 매체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관객 수가 줄었고 개봉 편수도 감소했다. 원인으로 쇼츠를 지목하는 이들도 많다. 1분 안팎의 강한 자극에 익숙해진 시대에 2시간짜리 영화는 너무 길다는 것이다. 하지만 길이의 문제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드라마나 예능은 여전히 강세이고, 사람들은 10부작이 넘는 시리즈를 몰아보기도 한다. 웹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짧게 나뉜 편을 밤새 이어 읽는다. 그렇다면 영화와 드라마·웹소설의 갈림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나는 '자극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요즘 드라마·소설·웹툰을 섣불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매회 강한 자극을 던지는 데 혈안이다. 액션을 위해 스토리를 개에게 던져주는 경우도 있다. 한 의학 드라마에서 의사가 전쟁터에서 총을 쏘는 장면은 당황스러웠다. 음식 드라마가 엔딩을 위해 타임슬립이라는 설정을 아무렇지 않게 소모한 것도 마찬가지다. 평면적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 회를 위해 억지 갈등을 밀어 넣는 형식은 이제 진부하다. 그래서 12부작이면 10부, 16부작이면 14부쯤에서 하차한다. 어차피 '권선징악'이거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일 테니까.

왕후민 작가의 소설집 '내 입으로 나오는 말까지만 진짜'는 오랜만에 "뭐지?"라는 질문으로 끝까지 달리게 만든 작품이었다. 여섯 편의 단편은 모두 같은 공간, 즉 첫 작품 '팬티 도둑이 뭐가 나빠'의 주인공 오빠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무대로 펼쳐진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그 고시원의 이웃들이다. 공유된 공간과 일관된 이야기 톤이 작품 전체를 촘촘하게 엮어주고, 미스터리한 기류는 앞선 단편을 다시 들춰보게 만든다.

소설은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소재를 택하지만, 입 밖으로는 잘 꺼내지 않는 방향으로 밀고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단편 제목을 그대로 소설집의 제목으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팬티 도둑이 뭐가 나빠와 '한 시간은 248원'이다. 흔해 보이는 청춘 착취와 가난한 연애의 서사지만, 이 소설은 '아프니까 청춘' 같은 미화와는 거리를 둔다. 오히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라는 태도에 가깝다. '나를 이렇게 착취하고 버려 놓고, 그깟 팬티 따위가 무슨 문제야'라며 항변하는 인물이나, 기대했던 남자와의 만남이 완전히 어그러졌는데도 "그래도 오늘 한 시간은 여전히 248원이었어"라고 냉소하는 인물 모두 그렇다.

세상은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현실은 거의 없고, 있다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름답지도 않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입으로 나오는 진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내 입으로 나오는 말까지만 진짜 | 왕후민 지음 | 루프 | 2238쪽 | 1만6800원

콘텐츠편집1팀 이근형 기자 ghlee@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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