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국민연금의 분노, LP·GP 신뢰 붕괴 단초 될수도

홈플러스 사태에도 GP 교체 안 한 국민연금
매각 추진 이지스자산운용은 '교체 초강수'
"안 좋은 선례로 운신의 폭 좁아질 수 있어"

국민연금이 이지스자산운용을 향해 사실상의 '분노'를 표출했다. 투자금을 맡겨 운용하던 자산운용사(GP)를 교체하겠다는, 전례 없는 강수를 둔 것이다. 국토교통부 출신 인사가 설립하고 국민연금 자금을 발판 삼아 성장해온 이지스자산운용은 매각 작업은 물론 기업의 근간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에 놓였다.

국민연금은 과거 더 큰 손실과 사회적 논란이 있었던 홈플러스 사태에서도 GP 교체라는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출자자(LP)가 운용 중인 펀드에서 GP를 교체한다는 것의 함의와 국내 LP 업계의 맏형이자 세계적 '큰손'인 국민연금의 상징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통상 LP가 선택하는 방식은 차기 펀드 출자 배제, 개선 요구, 또는 출자자자문위원회(LPAC)를 통한 압박이다. 운용 중인 펀드에서 GP를 사실상 배제하는 것은 업계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여겨진다.

유례없는 강경 대응에 나선 배경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이지스자산운용에 대한 불만이 누적돼 결국 폭발했다는 분석도 있다. 첫 GP 교체 대상 자산으로 거론되는 마곡 원그로브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역할은 국민연금이 했고, 이지스자산운용은 성과보수만 챙겼다는 불만이다.

마곡 원그로브는 국민연금이 투자한 역대급 부동산 자산이다. 2021년 2조3000억원을 투자했지만 2023년 12월 시공사 태영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며 공사 중단 위기를 맞았다. 국민연금은 대주단과 함께 3700억원을 추가 투입하며 사업을 살려냈다. 완공 이후의 공실 문제 역시 국민연금이 직간접적으로 입주자를 유치하려 애썼다. 그레이스타, 스타우드 등 해외 대형 운용사들의 입주에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작지 않았다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LP가 사실상 GP 역할까지 떠안은 셈이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GP 교체는 과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이번 이지스 사례처럼 기업 인수 실사 과정에서 매출 구성과 주요 비용 구조에 대한 정보 제공은 기본적인 상례다. 이를 문제 삼아 기업 매출 근간을 흔드는 조치를 취한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국내 최대 출자자인 국민연금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문제는 이번 결정이 남길 선례다. 국민연금이 움직이면 다른 연기금과 공제회가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 동시에 국민연금은 해외 운용사들 역시 출자를 받기 위해 줄을 서는 세계적 '큰손'이다. 이번 조치는 국내외 운용사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는 동시에, '갑질'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있다.

아무리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이라 해도 계약의 근간은 신뢰다. 감정에 가까운 대응은 단기적으로는 통쾌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 스스로의 운신 폭을 좁힐 수 있다. 'LP 리스크'가 있는 시장이라는 인식이 퍼질 경우, 실력 있는 운용사일수록 국민연금과의 거래를 꺼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가 달린 자금이다. 그만큼 여론의 외풍에도 취약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작은 손실에도 GP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한 번 선례를 남긴 이상 이를 방어할 명분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GP 교체가 잦아질수록 아무리 큰 자금을 출자하더라도 운용사들은 국민연금에 선뜻 다가서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실력 있는 GP들이 멀어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노후로 돌아온다.

증권자본시장부 이민우 기자 letzwi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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