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기자
우리나라가 혁신 성장의 척도로 불리는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을 13개 보유한 것으로 집계돼 세계 11위에 올랐다. 다만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미국은 229개사를 추가로 배출한 반면, 우리나라는 2개 늘어난 데 그치는 등 세계 선진국들보다 우리나라의 유니콘 기업 배출 및 성장 속도는 더딘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상공회의소는 3일 'CB 인사이츠'의 글로벌 유니콘 명단을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유니콘은 기업가치가 10억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는 비상장기업을 말한다.
지난 10월을 기준으로 전 세계 유니콘은 총 1276개였는데, 이 중 미국 기업이 가장 많은 717개를 기록하며 56.2%를 차지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미국 내 유니콘은 229개 늘어 전체 증가분의 72.2%를 책임지기도 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는 유니콘이 2개 추가됐고 중국은 오히려 19개 감소한 것으로 확인돼 유니콘 배출 양상이 가장 저조했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신산업 진입을 가로막는 포지티브 규제와 기업이 성장할수록 규제가 늘어나는 '성장 페널티'가 스타트업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제한된 내수 시장 속에서 해외 진출 및 글로벌 자본 유치가 부족한 점도 유니콘 배출을 저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에 반해 이스라엘과 싱가포르는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자금 지원과 인재를 바탕으로 투자자가 모여드는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며 상위 10위권 안에 들었다. 이스라엘은 23개로 7위, 싱가포르는 16개로 우리보다 한 단계 앞선 10위에 올랐다.
중국은 상위 10위권 국가 중 유일하게 감소세를 보였음에도 2위 자리를 지켰다. 151개로 집계됐다. 감소세는 지난 1월부터 인공지능(AI), 양자컴퓨팅,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 기업들의 중국 스타트업 투자가 금지되는 등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중국 벤처시장 위축에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글로벌 기업 데이터 플랫폼 '크런치베이스'는 지난해 중국 벤처투자 규모는 332억달러로, 2021년에 기록한 955억달러에 비해 3년 새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에선 AI 반도체 스타트업인 '리벨리온'이 지난 7월 처음 유니콘으로 등재됐다. 클라우드·AI 기업인 메가존클라우드는 4.12년 만에 유니콘에 등극하며 우리 유니콘 중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사인한 리벨리온 반도체. 연합뉴스
하지만 우리 유니콘들의 전반적인 성장 속도는 타국들에 비하면 상당히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설립부터 유니콘으로 성장하기까지 걸린 기간을 전수조사를 통해 분석한 결과, 우리 유니콘들은 평균 8.99년이 소요됐다. 중국이 6.27년으로 가장 빨랐고 독일(6.48년), 미국(6.70년), 이스라엘(6.89년)의 유니콘들도 우리보다 빠른 평균 6년대였다. 유니콘 보유 상위 10개국 전체의 평균 소요기간도 6.97년이었다. 기업별로 보면, 거대언어모델(LLM) 개발 기업인 오픈AI(3.62년), 앤스로픽(2.02년), 퍼플렉시티(1.72년)와 xAI(1.22년)는 AI 중심의 대규모 벤처투자에 힘입어 비교적 단기간에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중국 유니콘 중 가장 기업가치가 높은 바이트댄스(틱톡 운영사)는 유니콘 등극까지 5.07년이 걸렸다.
유니콘이 속한 업종에서도 상위 10개국과 우리나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상위 10개국의 유니콘들은 'AI·IT 솔루션' 분야가 36.3%로 가장 높은 비중을 보였다. 반면 우리 유니콘 기업은 '소비재·유통' 분야가 46.1%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다.
이에 우리 재계에선 첨단전략산업 분야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AI·IT 솔루션'의 유망 스타트업 육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한상의는 이와 관련해 혁신거점 도시를 집중 육성할 것을 제안했다. 실리콘밸리를 포함한 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혁신 생태계를 구축한 미국의 사례를 주목했다. 미국 유니콘 717개사 중 45.3%인 325개사가 이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미국 베이 지역 의회경제연구소의 션 랜돌프 이사는 지난 10월 대한상의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활발한 산학 협력과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다양한 인재들과 그 네트워크가 맞물려 베이 지역의 혁신이 발생하고 이에 투자자들이 모여들며 혁신이 더욱 활성화되는 선순환이 이뤄진다"고 밝힌 바 있다.
대한상의는 이어 이곳 혁신거점 도시에서 대규모 기업과 유니콘이 어우러진 혁신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정책 실험의 장인 '메가 샌드박스'가 조기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이 규제를 받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특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취지다.
투자 부문에서는 유니콘 우등국인 이스라엘의 사례를 들며 정부의 적극적인 마중물 투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요즈마 펀드'처럼 정부가 앵커 투자자로 들어가 민간 및 해외 벤처캐피털(VC) 자본을 끌어들인 뒤 초기 스타트업에 집중 투자하고 일정 시점이 되면 민간에 지분을 매각하는 모델이 조기에 정착돼 벤처 생태계가 빠르게 자립화됐다.
김현수 대한상의 경제정책팀장은 "기업 성장의 상징적 지표인 유니콘 기업 배출이 둔화하는 것은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라며 "제도 혁신과 풍부한 자본 유입이라는 양 축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유니콘 육성 생태계를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