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애기자
이재명 정부가 지난 8월 단행한 역대 최대 규모 신용사면이 윤곽을 드러내며 금융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연체 기록을 지워주는 조치는 겉으로는 서민 구제 정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성실하게 갚아온 이들의 허탈감, 그리고 시장 신뢰를 갉아먹는 도덕적 해이가 도사리고 있다.
올 하반기 신용사면 수혜자들의 보유 채무는 163조원, 이 중 실제 상환된 금액은 23조원(14%)에 불과했다. 나머지 약 140조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수혜자들은 신용점수 상승 폭이 큰 카드론과 대부업 연체를 우선적으로 갚았다. 실제 카드업권 상환율은 25.5%, 대부업권은 19.7%로 다른 업권보다 높았다. 그 결과 사면자들의 신용점수는 평균 30~40점 상승했다. 약 29만명은 새 신용카드를, 23만명은 은행권 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신용위험이 하위권에서 은행 등 상위 금융권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우려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117만명은 지난해 사면을 받은 뒤 약 5조원을 다시 빌려, 1년 만에 또다시 신용사면의 수혜자가 됐다. '중복 사면'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반복 사면은 시장에 '조금만 버티면 또 구제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신용사면이 채무자 구제가 아니라 '연체의 순환 구조'를 고착화하는 장치로 변질되고 있는 셈이다.
'사면의 기준'도 문제다. 현행 제도는 '개인'이 아니라 '대출 건별'로 적용된다. 한 사람이 다섯 건의 연체를 가지고 있다면, 한 건만 갚아도 그 기록은 즉시 삭제된다. 일부만 갚고도 신용점수를 올릴 수 있는 구조다. 반면 빚을 전부 갚은 성실상환자는 최대 5년간 연체 이력이 남는다. 성실함이 오히려 불이익이 되는 모순된 구조다. 사실 우리나라 이외 신용사면을 반복 운용하는 국가는 찾기 힘들다. 1999년 김대중 정권이 외환위기로 신용불량자가 된 106만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문재인 정부(228만명), 윤석열 정부(286만명)를 거쳐 이번 정부에서도 최대 370여만명이 혜택을 받은 것으로 관측된다.
물론 신용사면이 필요한 때도 있다. 코로나19나 고금리 충격 같은 예외적 상황에서는 재기의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모두를 위한 사면'으로 확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신용질서는 결국 '기억의 체계'다. 과거의 거래 기록을 바탕으로 미래의 신뢰를 판단한다. 그 기억을 정부가 임의로 지워버리면 시장은 더 이상 개인의 신용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금융의 핵심은 신뢰다. 사면이 반복될수록 금융회사는 금리를 높이고 대출을 줄일 수밖에 없다. 피해는 성실상환자와 일반 국민에게 돌아간다.
영국의 '부채구제명령(DRO)'이나 미국의 파산제도처럼 구제에도 책임의 이력이 남아야 한다. 우리의 신용사면은 흔적을 지워버린다. 기록이 사라지면 교훈도 사라진다. 정부가 진정으로 서민을 돕고 싶다면 성실상환자에게 금리 우대나 신용 포인트, 세제 감면 등 실질적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연체를 지워주는 나라'가 아니라 '성실을 기억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신용의 신뢰는 한 번 무너지면 수십 년이 걸려도 회복되지 않는다. 빚은 탕감할 수 있어도 신뢰는 탕감할 수 없다. 전방위적인 신용정보 삭제는 빚을 성실하게 갚는 유인 동기를 악화시켜 채무 불이행의 발생 빈도만 높일 뿐이다. 결국 한국경제의 체력을 좀먹는 독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