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반복되듯 지금 소환된 과거의 예술'...사회적 메시지 담은 이불 작가展

리움미술관 '이불: 1998년 이후' 전시
4일 개막, 내년 1월4일까지 전시
1998년 이후 작품 세계 조명
"정체성 규정 안해...관심 가는 대로"

역사는 반복된다. 10년, 20년 전 다뤘던 주제가 이미 해결된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역사가 반복되듯 예술이 전하는 메시지도 시대를 돌고 돈다.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설치작가 이불(61)의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불 작가의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 내부 전경. 전시관 입구에서 17m 길이의 은빛 비행선을 형상화한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20)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믿음 기자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오는 4일 개막하는 이불 작가의 전시는 1990년 후반 이후 작가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과 모형 등 150여점을 공개한다.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역사의 교훈'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길목에서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건 천장에 달린 17m 길이의 은빛 비행선이다.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2020) 작품으로 1937년 미국 뉴저지 상공에서 폭발해 36명의 사망자를 낳은 비행선 체펠린을 본뜬 설치물이다. 기술의 진보와 인류의 멸망을 함께 다룬 작품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통찰하며 예술을 통해 질문을 건네는 작가의 사회가적 면모가 돋보인다. 20세기 초 선보인 체펠린 비행선은 1937년 공중 폭발한 힌덴부르크 참사 이후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큐레이터는 "'거대 서사 실패 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시선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오바드 V'(2019) 작품. 2018년 비무장지대에서 철거된 초소의 자재로 제작된 작품으로 당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대립으로 치닫는 현 시대 상황에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서믿음 기자

'오바드 V'(2019) 작품은 당시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는 등 평화 무드가 조성되는 상황에서 남북 양측은 비무장지대에서 철거한 초소 자재로 만든 작품이다. 당시만 해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황이었기에 이데올로기적 작품 제작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야기하자고 할 때 전 그렇지 않다고 봤다"며 "모습을 바꿀지언정 극복한 적이 없고, 그럼 떠나보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욕조 형상의 작품은 고문이 가능했던 과거, 그리고 그런 가능성을 내비쳤던 최근 국내 상황을 연상케 한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직접적 언급은 피하면서도 "구상할 때부터 작품의 소재적 구상과 사회적 질문이 동시에 일어난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며 "'근대사'라는 호흡을 잡아놓고 접근했다. 자라면서 보고 배운 내용이 작업에 여러 방식으로 포장돼 있다"고 설명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케 하는 전시물. 서믿음 기자

'벙커 (M. 바흐친)'(2012)은 10대 시절 접경지역에 살았던 경험에 기인한다. 작가는 어린 시절 군사정권에 의해 정치적 탄압을 받은 부모님이 접경지역에 머물면서, 그마저도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던 시기에 접한 군사시설인 벙커를 역설적이게도 유토피아적 존재로 인식했다. 작가는 "어릴 적 기억은 그냥 아이들과 뛰어놀던 곳이었다. 성인이 돼 다시 소환해 보니 쉘터 느낌으로 전해졌다"며 "단단한 (콘크리트) 재료가 주는 안락함이 선사하는 자유로움이 있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1987년 활동을 시작한 이불은 그간 파격적 전시 내용으로 주목받았다. 나체로 천장에 거꾸로 매달리는 '낙태'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여러 촉수가 달린 의상을 입고 일본 도쿄 시내를 활보했다. 1997년에는 미국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날생선을 유리장 안에 넣은 뒤 부패 과정을 전시한 설치작 '장엄한 광채'를 선보였다가 악취로 중도 철거되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 신체와 사회를 조명하는 작품 활동을 벌였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이불 작가가 발언하고 있다. 서믿음 기자

과거 작품의 의미가 지금 시대에도 여전함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회고전을 넘어서는 서베이전 성격을 지닌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작품을 시간순이 아닌, 과거와 미래의 모습으로 펼쳐낸 것이다. 관객은 자유롭게 느껴주셨으면 좋겠다"며 "(관람객이) 작품의 의미가 현재의 것이라 느낀다면 보람을 느낄 것 같다. 혹 지나간 일이라고 느낀다면 인류를 위해선 그편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속마음을 전했다.

전시는 내년 1월4일까지 이어진다. 내년 3월 홍콩 M+ 뮤지엄 전시, 이후 유럽과 캐나다 순회전을 진행할 예정이다.

문화스포츠팀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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