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VC '대펀'의 창업, 그냥 넘어갈 일 아니다

류중희 퓨처플레이 전 대표의 '창업 행보'를 두고 벤처캐피털(VC) 업계에서 한 달 가까이 여진이 이어지고 있다. '퓨처플레이 뉴엔터테인먼트펀드'의 대표펀드매니저(대펀) 자리를 후임자에게 넘기고 로보틱스·인공지능(AI) 기반의 차세대 기술기업 '리얼월드' 경영에 전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부터다. "충분히 가능한 커리어 전환"이라는 옹호도 있지만 "출자자(LP)의 신뢰를 저버린 행위"라는 목소리도 많다.

류 전 대표는 카이스트(KAIST) 전기전자공학부 박사 졸업 후 얼굴인식 기술업체 올라웍스를 창업해 2013년 인텔에 매각한 창업자 출신이다. 이후 퓨처플레이를 설립해 액셀러레이터(AC) 겸 VC로서 딥테크 스타트업 육성에 주력해 왔다. 이번에 물러난 펀드는 175억2500만원 규모로 조성됐으며 만기까지 약 4년이 남은 상황이다. 류 전 대표 측은 "창업 결심 이후 사전에 주주 및 LP에 충분한 소명을 통해 공식적인 동의 절차를 마쳤다"고 했지만 그를 신뢰하고 자금을 맡긴 당사자 측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향후 유사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제도적 보완이 절실하다. 개인에 대한 갑론을박이 아닌 '시스템의 작동'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현재 한국 VC 업계엔 '대펀'의 중도 이탈이나 이해상충을 조율할 마땅한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부재하다. '대펀'이 펀드 운용 도중 갑자기 물러나도 신규 투자가 중단되는 사례가 적고, 수수료 삭감이나 펀드 청산 절차도 명확하지 않다. LP들이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제도적 절차가 자리 잡은 미국은 다르다. 핵심인물 조항(Key Person Clause)과 제한적 계약조항(Restrictive Covenant) 등을 통해 시스템으로 생태계를 보호한다. '대펀' 이탈 시 LP 대다수의 동의가 없으면 펀드 운용이 멈춘다. 수수료를 조정하거나, 심지어 펀드 청산까지 검토 대상이 된다. 경쟁 금지, 인력 유인 금지, 비밀 유지 등 핵심 인물의 이해상충을 막기 위한 다양한 조항들도 포함된다. 한국도 비슷한 조항이 일부 있지만 실효성은 미미하다. 모태펀드 출자 약정서에 명시된 경우도 '사전 보고' 수준에 그치고 제재로 이어진 사례는 드물다.

스타트업 생태계는 결국 신뢰로 작동한다. 창업자는 파트너의 일관된 지원을 믿고 비즈니스를 설계하고, LP는 대표의 비전에 공감해 자금을 맡긴다. 중간에서 흐름이 끊기고, 당사자가 새로운 사업으로 떠난다면 신뢰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 중소형 VC 대표는 이번 사안에 대해 "이제는 도덕적 기대가 아니라 계약과 절차를 설계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창업자와 투자자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규칙을 정립하는 일은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태계 지속을 위한 조건이다. "그럴 수도 있다"로 끝내기엔, 걸려 있는 것이 너무 많다.

증권자본시장부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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