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윤기자
김형민기자
국내 반도체 산업의 중요한 파트너인 소재·부품·장비업체들은 대형 반도체 제조사에 공급할 때 특허 보증을 떠안는다. 자칫 특허 소송에 휘말릴 경우 제조사는 납품을 중단하고 특허에 책임이 없는 점을 문서로 확약하는 것이다. 소부장 기업들은 재판에서 승소하더라도 소재나 부품 공급을 재개할 수 없다. 특허 보증이 소부장 기업에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 소부장 업체 A대표는 최근 아시아경제에 "대형 반도체 메이커와 공급계약을 맺을 때 특허 같은 지식재산권 부분에서 문제가 되면 거래를 중단한다는 내용의 특허 보증 절차를 거친다"며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이 공급업체에 귀속되는 것으로 규정된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장비업체가 특허 소송을 제기하거나 특허 침해 경고장을 보내면 메이저 중소기업 같은 경우는 계속 싸우고 저희 같은 작은 기업들은 ‘앞으로 판매 안 하겠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응할 인력이 없는 데다 소송 대응 비용도 막대해 사업 존립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소부장 업체 B대표도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나 램리서치, ASML 같은 대형 장비사들은 상도의 차원에서 고객사인 파운드리 업체에 소송을 걸 순 없고 그 부품을 납품한 소부장 업체를 문제 삼는다"며 "대부분 기술은 특허로 보호받고 있어 후발 주자인 국내 소부장 기업들이 이를 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중소 소부장 기업들은 납품하는 제품이 제조사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경우 언제 어떻게 특허 공격을 받을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 대표는 "단순히 기존 기술을 복제하는 것은 당연히 잘못된 일"이라며 "하지만 정말 새로운 기술이나 더 나은 부품을 개발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고 했다.
더 나은 부품을 개발해도 제조사들이 도입하기 어려운 현실적 이유도 있다.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해외 장비사들은 반도체업계에서 ‘슈퍼을(乙)’로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와 같은 대형 반도체 제조사들은 장비사와의 긴밀한 관계가 없으면 최첨단 기술 도입이 어렵다. B대표는 "삼성전자나 TSMC에도 쉽지 않은 이야기"라며 "새 제품을 적용해 보려고 시도하더라도 해외 장비사가 딱 버티고 있다"고 했다.
A대표도 "공들여 개발한 부품을 내놓아도 해외 장비사들이 전기 신호나 소프트웨어 호환성 문제 등을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반도체 업계 특성상 회사가 특정될 수 있어 구체적인 사례는 말씀 못 드리지만 우리 회사 주변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했다. "해외 장비사들이 기존 부품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강해 기술적 제안이 쉽게 수용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결국 국내 소부장 업체들은 대형 제조사는 물론이고 ‘슈퍼을’인 해외 장비사 눈치를 봐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소부장 업체가 고래 싸움에 낀 새우처럼 어려운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소부장 기업들은 대만 TSMC와 삼성전자 협력 방식까지 비교한다. A대표는 "TSMC는 해외 장비사와 계약 초기 단계부터 중소기업과도 협력해 더 나은 부품을 개발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며 "대체로 해외 장비사들은 타사 부품 사용을 꺼리지만 TSMC는 더 나은 제품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 적용해 본다"고 했다. TSMC를 고객사로 둔 B대표도 "TSMC는 업그레이드를 은밀하게 진행해 장비사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며 "기존 것을 빼앗은 게 아니라 더 나은 방향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라면 괜찮다는 의미"라고 했다.
국내 소부장 업체들은 법적 환경에서도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다. 자칫 소송에 휘말렸다는 소문만 나도 내부 동요가 나올 수 있어 ‘쉬쉬’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익명을 요구한 변리사는 "소송장을 회사가 아닌 대표이사 앞으로 직접 보내는 사례도 적잖다"고 말했다.
많은 분쟁이 비공개로 이뤄지기 때문에 관련 정보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채 소송에 대응해야 하는 점도 문제다. 법적 방어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비공개 소송 구조는 소부장 업체들이 특허 분쟁 정보를 공유하거나 전략적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데 있어 큰 한계로 작용한다.
백종웅 인트로특허법률사무소 대표변리사는 "미국에서는 누구나 소송 정보를 열람할 수 있고 소송 관련 데이터베이스도 활성화돼 있어 정보를 쉽게 확보할 수 있지만 한국에선 사건과 이해관계가 있는 당사자만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다"며 "실제 분쟁 중인 사건들은 뉴스에 보도되는 것보다 훨씬 많고 협상을 통해 비공개로 해결되는 경우도 상당수라 소부장 업체들이 정보를 얻기 어렵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해외 장비사 영향력 속에서 우리 소부장 업체들이 특허분쟁의 먹잇감이 되지 않으려면 소송에 휘말리기 전에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백 변리사는 "자체 개발한 부품을 출시할 때 특허 문제가 없다는 것을 명확히 선언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하지만 우리 소부장 기업들은 특허에 대해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며 "제품을 생각하는 단계, 제품을 구체화하는 단계, 제품을 완성하는 단계에서 경쟁 성격이 있는 특허를 따져보는 특허침해분석(Freedom to Operate·FTO)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또 중소기업은 자체적으로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만큼 특허 심사 강화 등 정부 지원도 필수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소부장 업체들이 대기업과 안정적으로 협력해 기술 도입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A대표는 "기술적 교류나 개선 사항을 논의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며 "현재로서는 이런 창구가 제한적이지만, 협력사들도 주도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구조가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