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정기자
장희준기자
윤석열 대통령은 4일 "연금·노동·교육·의료개혁 등 4대 개혁은 국가 생존을 위해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체절명의 과제"라며 "정부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4대 개혁을 반드시 완수해 낼 것"이라고 밝혔다. 오는 10일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국정 지지율이 최저치를 기록하고, 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이지만, 4대 개혁에 대한 추진 의지는 변함없음을 재차 시사했다. 특히 30분에 달하는 시정연설에서 '개혁' 단어가 19번 최다 등장하면서 개혁 과제에 대한 흔들림 없는 추진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독한 시정연설을 통해 "정부가 마련한 내년 예산안은 민생 지원을 최우선에 두고 미래 도약을 위한 체질 개선과 구조개혁에 중점을 두어 편성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먼저 "정부 출범 이후 지난 2년6개월,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을 정도로 나라 안팎의 어려움이 컸다"고 언급한 윤 대통령은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은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으로 코로나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절 못지않게 힘들었고, 정부는 대내외 위기에 맞서 경제 역동성을 회복하고 민생의 어려움을 풀기 위해 2년6개월을 쉴 틈 없이 달려왔다"고 평가했다. 시장경제와 건전재정 기조를 정착시키고, 경제의 체질을 민간주도 성장으로 바꾸는 데 역량을 집중해왔다는 설명이다.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저출생 고령화'라는 미증유 도전에 직면하면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무엇보다 구조개혁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생명과 지역을 살리는 의료개혁에 온 힘을 쏟고 있다"면서 "당면한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과 '비급여·실손보험 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 나가는 한편 향후 5년간 30조원 이상을 투입해 의료개혁 과제를 차질 없이 뒷받침하고 '지역완결적 필수의료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말했다.
연금개혁도 중대한 민생 과제로 꼽았다. 연금은 현재 세대와 미래세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이에 대한 개혁을 더이상 늦추기 힘들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세대별 간담회, 방문 인터뷰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의 의견을 충실히 수렴해 지난 9월 정부 차원의 단일한 연금개혁안을 제시했다"면서 "정부안은 논의의 시작이자 기준점으로 국회 논의 구조가 조속히 마련돼 빠른 시일 내 사회적 대합의가 이뤄지고 법제화가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더뎠던 노동개혁의 속도를 높이고 '노동약자보호법', '공정채용법'과 같은 노동개혁 입법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일자리 기회를 넓히는 노동제도 유연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며 "연공서열에서 직무와 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를 개선해 나가고, 개인별로 다양한 근무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늘봄학교 역시 내년 초등학교 2학년으로 확대하는 등 단계별로 6학년까지 대상을 넓혀 아이 돌봄을 국가가 책임지는 '퍼블릭케어 시대'를 완성하겠다고 했다. 국회에는 인구 위기 극복을 위해 인구전략기획부가 신속히 출범할 수 있도록 정부조직법 등 관련 법안들을 조속히 처리해줄 것을 당부했다.
윤 대통령은 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 변화와 대내외 환경의 불확실성 등 앞으로 재정 운용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는 만큼 재정의 지속가능성 확보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건전재정은 단순히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뜻이 아니다"며 "느슨했던 부분, 불필요한 낭비는 과감히 줄이고, 민생 회복과 미래 준비라는 국가 본연의 역할에 제대로 투자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2025년도 총지출 규모는 올해보다 3.2% 증가한 677조원으로 관리재정수지 적자 규모는 정부가 추진 중인 재정준칙 범위 내"라며 "정부는 내년 예산안을 통해 맞춤형 약자복지 확충, 경제활력 확산, 미래 준비를 위한 경제 체질 개선, 안전한 사회와 글로벌 중추 외교 등 4대 분야를 중점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R&D) 투자를 선도형으로 전면 개편하고 인공지능(AI), 바이오, 양자 등 3대 게임체인저와 12대 전략기술을 중심으로 역대 최대인 29조7000억원을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반도체 메가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저리 대출 4조3000억원을 제공하고, 도로와 용수 등 관련 기반 시설을 적기에 확충해 반도체 초격차 확보에도 나선다. '원전산업 성장펀드'를 조성해 원전 생태계의 복원과 도약을 이끌고, 'K-방위산업 수출펀드’도 조성할 계획이다.
글로벌 중추국가 외교를 위한 노력도 강화한다. 윤 대통령은 "내년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큰 성과로 이어지도록, 전방위적인 지원을 펼치겠다"면서 "내년도 공적개발원조(ODA)를 6조7000억원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윤 대통령은 "최근 국제 안보 상황과 북한·러시아의 불법 군사 공조는 우리 안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진단하고 "모든 가능성을 점검해서 철저하게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목숨을 걸고 자유 대한민국을 찾아온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보호와 지원도 획기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며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금을 50% 인상하고, 탈북민 자녀들의 교육과 취업을 세심하게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최근 청소년들까지 확산되고 있는 마약 범죄 근절을 위해서는 관련 예산을 올해보다 20% 이상 늘리고 첨단 탐지 장비 확대, 국제공조 강화를 통해 마약 유입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했다.
한편 이날 시정연설에 윤 대통령이 불참하면서 11년 만에 국무총리가 연설문을 대독하게 됐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 참석 여부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지만 여야 대치 국회 상황과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 녹취 파장 등으로 상황이 여의찮다고 판단, 시정연설에 불참했다.
현직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은 1988년 10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연설이 첫 사례였으며,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는 대통령의 예산안 시정연설이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3년 10월, 2008년 10월 각각 예산안 시정연설을 했고, 이후 임기 동안에는 총리가 대독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첫해부터 매년 시정연설에 참석했고 2022년, 2023년 윤 대통령이 직접 시정연설하며 11년 연속 현직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관행처럼 굳어졌지만 올해 윤 대통령이 불참하면서 11년만에 명맥이 끊기게 됐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 총리와 주례회동을 갖고 "연내에 국민들께서 정책 성과를 직접 체감하실 수 있도록, 현재 추진 중인 개혁 과제에 대한 각 부처의 신속한 추진을 독려하고 점검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