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길기자
최석진법조전문기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른바 ‘신군부 비자금’이 남아있다는 의혹이 커지자 그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내주 열리는 국정감사에 노 전 대통령 일가를 증인으로 부르기로 했으며 검찰에선 비자금에 대한 본격 수사에 나설지 검토 중이다.
이런 움직임은 신군부 비자금이 대를 이어 자녀들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증언이나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과 무관치 않다. 전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는 지난해 5월 "가족 구성원들이 하는 여러 가지 사업체들 보면 그래도 최소 몇백억은 있지 않을까"라며 "다른 손자 손녀들에 대해 왜 조사가 안 이뤄졌나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고 밝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최근엔 ‘세기의 이혼’으로 주목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드러난 비자금 ‘300억원’과 동아시아문화센터의 기부금 147억원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요구도 나왔다.
정치권에서는 오래된 일이라 관련자들이 사망했거나 증거가 없어 추징하지 못한 비자금이 수백억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손들이 한국 사회에 자산가로서 명맥을 잇고 있다는 비판에 따라 신군부 일가의 은닉 재산에 대한 재조사 및 환수의 필요성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중심으로 두 차례 반란과 내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전·노 전 대통령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기업한테서 거뒀다.
1996년 2월 비자금 조성에 대해 열린 첫 재판에서 전 전 대통령은 "취임 시 기업들의 돈을 안 받았더니 기업들이 밤에 잠도 못 자고 불안해했고 투자 의욕도 없이 외국으로 달아날 생각만 했다"며 "기업들은 우국충정과 같은 일종의 사명감으로 돈을 낸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혀 충격을 안겼다.
전 전 대통령은 약 35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법원으로부터 선고받은 추징금 액수는 2205억원이다. 2021년 11월 사망 당시 956억원을 미납했으며, 사후 추가 추징 후 최종 미환수 금액은 867억원에 달한다.
비자금 수사와 재판 결과를 보면 비자금 일부는 전 씨의 가족들에게 넘어갔다. 전 씨는 1992년 8월 연희동 사저로 딸 효선 씨의 시어머니 박혜숙 씨를 불러 1억원짜리 장기신용채권 23장(23억원)을 직접 건넸다. 친형 전기환 씨에게 대통령 취임 때부터 구속 전까지 매년 1500만원의 생활비를 줬고 이모 김필문, 김상문에게도 아파트 등 주택구입비 4500만원과 매월 생활비 300만원을 정기적으로 주는 등 1000여명의 친인척을 금전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 전 대통령 일가의 부동산도 상당 규모로 파악된다. 전두환 일가가 평창동, 이태원, 파주 등 수도권에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만 2023년 1월 기준 25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원씩은 연희동 자택 금고와 시공사(전재국), 준아트빌(전재용), 미국 나파밸리 와이너리(다나 에스테이트) 등 불법으로 형성한 재산이라고 폭로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약 46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대검 중앙수사부(현 반부패부)가 발표했다. 법원은 이 가운데 2682억원만 추징했다. 나머지 금액은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환수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더 이상 납부할 재산이 없다며 2007년부터 2013년까지 7년간 동생 노재우, 사돈 신명수와 비자금 추징을 두고 법정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노재우는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의 은닉재산을 폭로했고 신명수는 노재헌-신정화 이혼 재산 분할을 요구하며 사회 환원을 하겠다고 했다가 돌연 비자금을 납부해 풀리지 않는 의혹을 남겼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은 딸의 이혼소송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2심 재판부가 과거 드러나지 않았던 비자금 존재 여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는 ‘김옥숙 메모’가 있다.
노 관장은 항소심에서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이 SK에 유입됐다"며 그 근거로 모친인 김옥숙 여사가 남긴 ‘메모’를 증거로 제시했다. 재산분할을 요구하기 위해 불법 자금의 존재를 스스로 알린 셈이다. SK는 비자금이 유입된 바 없다고 반박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메모와 노소영 증언을 근거로 비자금의 존재를 인정했다.
김 여사가 작성해 비밀리에 보관하던 메모에는 ‘선경(SK) 300억’외에도 ‘노회장 150억’, ‘신회장 100억’, ‘이병기 52억’, ‘금고 10억1000’, ‘별채 5억’ 등 특정 인물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있다. 숨은 자금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 회장은 "SK의 성장이 불법적인 비자금을 통해 이뤄졌다, 6공화국 후광으로 사업을 키웠다 등 판결 내용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며 대법원에 상고했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최 선대회장에게 300억원을 증여한 것이라면 현행법상 추징은 어렵다. 범죄 행위자 사망 등의 이유로 공소를 제기할 수 없는 경우 불법 축적한 재산이라도 몰수나 추징할 수 없어서다.
반면 300억원을 맡겼거나 받아야 하는 채권이었다면 상속재산이 되기 때문에 과세 대상이 된다. 국세기본법 26조에 따르면 납세자가 부정행위로 상속세, 증여세를 포탈한 경우 해당 재산의 상속 또는 증여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1년 이내 상속세 및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다.
검찰은 관련 고발장을 접수해 사건을 배당하고 수사 개시 가능성을 검토 중이다. 지난달 19일 이희규 한국노년복지연합 회장은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불거진 노태우 전 대통령의 ‘300억원 비자금’ 진위를 수사해달라는 고발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 고발장에는 최 회장과 노 관장, 김 여사, 노재헌 씨 등 비자금 은닉 및 조세 포탈 혐의를 수사해달라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