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기자
"다들 1, 2년에 한 번씩 망하고 간판을 바꿔 달죠."
광주 동리단길 홍차 전문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혜준씨(23)는 동리단길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동리단길이란 광주 동명동과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을 합성해 만들어진 길 이름이다. 고급 주택과 한옥이 자리했던 동명동은 2010년대 중반부터 레트로 콘셉트의 카페거리로 재탄생했다. 낡은 시멘트벽과 붉은 벽돌 건물, 슬레이트 기와지붕 등이 오늘날의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재해석돼 젊은 층이 많이 찾았다. 5·18 민주화운동 유적지인 전일빌딩, 옛 전남도청과 가깝고 지하철 문화전당역에서 도보 5~7분 거리에 위치해 접근성이 뛰어난 것도 장점이다.
최근 동리단길 유동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젠트리피케이션과 더불어 시리단길(쌍암동)로 불리는 첨단지구 내 유흥 거리가 경쟁상권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양림동 문화마을 관광코디네이터인 고민선씨는 "요즘 광주 젊은이들은 시리단길로 모여든다"고 귀띔했다. 시리단길은 첨단지구 내 민간 기업 '시너지타워'와 경리단길을 합성해 이름 지어진 곳으로, 광주 최대 핫플레이스 중 한 곳으로 꼽힌다.
황리단길(경북 경주시 황남동)은 'O리단길 신드롬'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2015~2016년 즈음 대릉원 인근 상인들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취향에 맞춘 점포를 열기 시작했고, 2017년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경리단길의 이름을 딴 '황리단길'로 불리기 시작하며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유적지 근처라 유흥시설은 부족하지만 문화유산인 대릉원과 첨성대가 코앞에 있어 집객 효과를 톡톡히 봤고, 도보로 동궁과 월지(안압지), 교촌마을, 월정교 등을 함께 구경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했다. 더불어 역사 도시답게 한옥 숙박, 한복 입기 체험 등 다양한 콘텐츠도 이목을 끌었다. 경주시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1300만명이 넘는 방문객이 황리단길을 찾았다.
SNS에서 '노잼도시'로 불리는 일부 도시들도 'O리단길'을 만들었다. 대전의 갈리단길(서구 갈마동)도 비교적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대전의 젊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국적 콘셉트의 가게들이다. 뜻을 알기 어려운 일본어 간판을 단 주점과 음식점, 멕시코 국기를 연상케 하는 형형색색의 인테리어로 치장한 타코 가게 등이 갈리단길에도 즐비했다. 4~5층 규모의 빌라촌에 카페와 음식점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점심 시간대는 주차할 공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방문객이 많았다. 사람들의 손에 들린 성심당 봉투만 아니었다면 이곳은 서울 경리단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갈리단길에서 만난 대학생 길다빈 씨(23)는 "이곳에 입소문 난 핫한 카페들이 있다고 해서 와봤다"고 했다.
하지만 'O리단길=골목 상권 부흥'이란 공식이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기자가 지난달 19일 찾은 울산 남구 공리단길은 원조의 명성에 견주긴 어려워 보였다. 휴대폰 지도 애플리케이션(앱)을 켜고 한참을 헤매도 어디가 공리단길인지 사람들이 몰려들만한 상권을 찾기 힘들었다. 식당·카페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거리가 휑했다. 지역민에게 "공리단길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어봤지만 "모른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외국인 거리를 중심으로 이국적인 콘셉트를 내세운 울산 동구 꽃리단길도 사정은 비슷했다.
성리단길로 이름을 날렸던 청주 성안동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CGV, 메가박스 등 영화관이 있어 MZ세대들이 모이는 '청주 내 핫플레이스'로 꼽힌다. 그러나 지난달 22일 찾아간 성안동은 가게 하나 건너 하나가 공실인 수준이었다. 건물 하나가 통째로 비어있는 곳도 있었고, 한 골목 전체가 공실인 곳도 있었다.
지방에 O리단길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것은 일단 조성하면 일정 수준의 흥행을 보장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최근 오영주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O리단길 육성 프로젝트'를 내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역소멸 위기를 해결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로컬 크리에이터를 중심으로 명품 상권을 만들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전문가들은 흥행의 관건은 상권 모방이 아니라 개성 찾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미 자리 잡은 경리단길을 베껴오는 것이 아니라, 로컬의 힘을 키워 '이곳만의 특색'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혜진 대전세종연구원 연구위원은 "서울 중심으로 개발이 이뤄지고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자산이 모두 수도권에 몰려있다보니 '힙하고 멋진 것'의 표준은 언제부턴가 항상 서울이 됐다"며 경리단길 등 서울의 성공 사례만 좇다 보면 몰개성화되기 쉽다고 꼬집었다.
부산의 전리단길(부산진구 전포동)은 지역 특색을 잘 살린 사례로 꼽힌다. 전자상가와 철물점 등 공구 점포 등을 인테리어 요소로 활용해 MZ세대들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미 뉴욕타임스가 가볼 만한 세계 명소 52곳 중 하나로 부산을 꼽으며 이곳을 소개하기도 했다.
주변 상권을 견인할 앵커(Anchor·닻)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선박을 단단히 고정하는 닻처럼 개성과 고유성을 기반으로 지역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랜드마크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성심당이 인기를 얻은 이후 대전이 '빵의 도시'가 되고, 민간 서피비치 사업이 흥행하면서 강원 양양이 서핑의 성지가 된 것이 그 예다. 두 도시는 앵커 브랜드를 기반으로 지역 이미지를 구축한 뒤로 방문객이 급증했다.
모종린 연세대 교수는 "의미 있는 동네 브랜드를 전국적으로 유명하도록,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재개발로 다 파괴하지 않고 원도심의 건축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 교수는 "재개발로 다 파괴하고 신도시를 만들면 원도심에 있는 동력이나 문화 자원이 약해진다"며 "문화자원이 풍부한 동네에 로컬 메이커스페이스(지역 소상공인이나 예술가 등이 모여 교류하고 협업하는 공간) 등을 지원하면 살릴 수 있는 동네가 많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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