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SK 이끈 '방목경영'의 한계

2000년대 후반 SK그룹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고위 공무원은 최근 사석에서 당시 SK의 경영문화를 "방목경영"이라고 표현했다. 민간기업 경험을 위해 휴직하고 2년간 SK에 입사했는데, 다른 그룹과 달리 다소 느슨한 모습을 ‘방목’에 비유한 것이다.

방목경영을 외부에서만 느낀 건 아닌 것 같다. 신헌철 전 SK㈜ 사장도 2006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했다. 그는 "1983년에 300만달러가 넘는 돈을 유전사업에 쏟아부었는데 기름 한방울 나오지 않았다"면서 "최종현 선대회장은 그래도 계속 밀어붙였다. 나중에 그걸 우린 ‘방목경영’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소가 풀을 뜯어먹도록 내버려 둔다는 건데, 실패해도 또 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방목’형태의 SK 경영은 기업의 핵심가치인 ‘따로 또 같이’라는 고유철학과도 상통한다. 계열사 경영은 이사회를 중심으로 ‘따로’ 하되, 상호 협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수펙스추구협의회라는 그룹 수뇌부 회의를 통해 ‘같이’한다는 뜻이다. SK만의 그룹 운영 방식이다. 이는 SKMS라는 경영관리체계에 고스란히 담겼다. 모두의 행복을 위해 구성원들이 자발적이고 의욕적인 두뇌활동을 하게 된다는 게 작동원리다. 최 선대회장은 1979년 SKMS를 정립하면서 "SK의 독특한 경영기법"이라고 언급했다.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로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이뤘고 1994년 한국이동통신을 사들이면서 급성장했다.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기업문화 덕분이다.

하지만 방목경영에서 혁신을 찾기란 더 이상 어려워졌다. 정유와 이동통신은 국가기간산업이다. 해외수출시장을 개척하지 않아도 안정적인 수익을 취할 수 있는 사업이라는 뜻이다. 2012년 하이닉스를 인수하기 전까지 SK에는 ‘내수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방목경영'을 말한 고위 공무원은 "공무원보다 더 관료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계열사간 자율경영은 중복투자를 불렀다. 새로운 먹거리 개발에 각사가 나서면서 불거진 일이다. LNG 사업에서 SK E&S와 SK가스가 겹치고 수소사업도 영역이 흐려졌다. 전기차 분야에선 SK온이 배터리 사업을 맡지만 음극재는 SK머티리얼즈와 SKC가 각각 추진하고 있다. 전기차 충전 사업에는 SK에너지, 렌터카, E&S, 시그넷 등이 나서는 식이다. 하지만 계열사의 자율경영 철학 때문에 그룹은 교통정리에 소극적이다.

경영시스템을 정립한 이후 40년 이상 SK를 이끌어 온 ‘방목경영’은 기로에 섰다. 오는 28일과 29일 열리는 SK 경영전략회의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건 경영철학의 대전환 가능성 때문이다. 이미 최창원 수펙스 의장의 등장으로 오너 일가가 경영 전면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왔다. 최 의장의 성향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뭔가 작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발언을 보더라도 과거에 비해 수위가 높아졌다. 최 회장은 2016년에 내놓은 "딥 체인지(근본적 변화) 아니면 서든데스"라는 발언을 최근 다시 꺼냈다. 1998년 그룹 회장 취임사에서 "딥 체인지 아니면 슬로우 다운(뒤처짐)"이라는 메시지보다 강도가 세졌다. 뒤처지는 데 그치지 않고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경고다. 생존을 위해선 변화가 불가피하다. 이번 경영전략회의가 각별히 주목받는 이유다.

산업IT부 최일권 기자 igchoi@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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