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채석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2022년 6월 네덜란드 장비업체 ASML 출장을 다녀온 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기술"이라고 말했다. 경계현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 겸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은 지난 3월 DS(반도체) 부문장 자격으로 주주총회에 참석해 "올해 삼성 DS 부문은 ‘실패해도 괜찮다’라는 심리적 안정감을 바탕으로 세상에 없는 기술을 향해 담대한 도전을 실행해 갈 것"이라고 했다. 끊임없는 혁신이 회사의 미래와 생존을 보장한다는 철학을 설파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노동조합으로부터 창사 이래 첫 파업 통보를 들었다. 이현국 전국삼성노동조합(전삼노) 부위원장은 지난달 29일 파업 선언 기자회견에서 "HBM(고대역폭메모리) 위기는 경영 리스크 사태"라며 "삼성에 똑똑하고 유능한 직원이 많아 마음만 먹으면 (HBM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데 회사가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아 그런 마음을 먹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장과 부문장이 강조했던 ‘혁신 DNA’가 약해져 기술력이 떨어진 게 첫 파업의 빌미가 됐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삼성전자 직원들 얘기를 들어보면 전삼노 측이 제기한 보상 체계 불만에 동의하지 않는 목소리가 더 많다. 지난해 평균 1억2000만원을 받아 간 삼성전자 직원이 ‘성과급 형평성’을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다.
하지만 노조가 ‘HBM 위기는 경영 리스크’라고 지적한 부분은 새겨들을 만하다. 삼성전자 내부와 산업계에서는 HBM 반도체와 D램 시장 리더십을 SK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D램, 낸드플래시 등 1등 시장에 안주해 인공지능(AI) 전환 격변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번 삼성 파업 선언은 느리고 약해진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지난달 전영현 부회장으로 반도체(DS) 수장을 교체한 직후 노조가 파업을 선언했기 때문에 조직 분위기를 추스르는 건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됐다. 사장급(사업부장) 교체도 조심스러워하던 삼성이 부회장급(부문장) 교체 인사를 느닷없이 단행한 것은 파격적이었다는 평이다. 전 부회장에게 삼성 경영진과 시장이 기대하는 것은 조직 기강을 바로잡고 더 늦기 전에 ‘초격차’ 리더십을 되찾도록 임직원들을 독려하는 것이다.
전 부회장은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한 이력이 있는 베테랑이다.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 신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1999년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합병되면서 LG반도체에서 삼성으로 넘어온 뒤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재임기에 세계 최초로 20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이하 미세공정 개발을 이끌었다. 삼성SDI 배터리가 탑재된 갤럭시 노트7 화재 사태 위기를 돌파한 적도 있다.
AI 전환기에 대응하지 못한 삼성은 SK에 밀려 자칫 ‘2등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듣는다. 파업 선언은 삼성전자가 혁신 DNA를 살려내야 한다는 경고음이다. 느슨해진 고삐를 죄고 선단 기술 경쟁, 고객사 수주 등을 다시 한번 챙겨볼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