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미담기자
3년 차 직장인 양은지씨(27)는 최근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양 씨는 대학 졸업 이후 곧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원하던 직장에 합격했으나, 강도 높은 업무와 반복되는 야근에 지쳐 퇴사를 결심했다. 마케팅 부서에서 일해온 그는 "지금 하는 일이 내 적성과 맞지 않는 것 같다"며 "취업난 때문에 비슷한 직무로의 '환승이직'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이직부터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쉬는 동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에 대해 알아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젊은층 사이에서 학업이나 일을 잠시 멈추고 자아를 찾는 '갭이어(Gap year)'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본래 갭이어는 외국에서 유행한 문화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쉬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는 기간을 뜻한다. 국내에서도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들까지 잠시 '쉼'을 택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다.
갭이어는 이미 서구권에서는 활발한 문화다. 미국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매사추세츠공대(MIT)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도 학생들에게 입학 연기를 권장하고 있다. 고교 수험생활을 마치고 '번아웃'(탈진)된 학생들에게 재충전의 기회와 삶의 다양한 경험을 쌓을 시간을 주겠다는 의미다. 특히 2016년엔 하버드대에 합격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큰 딸 말리아가 갭이어를 위해 입학을 한 해 미루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이는 미국서 갭이어 문화가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이외에 배우 엠마 왓슨과 영국의 해리 왕자도 갭이어를 가졌다.
한국 또한 대학 진학 후 잠시 '쉼'을 위해 휴학을 결심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서구권과 달리 우리나라는 어학연수, 인턴, 자격증 취득 등 스펙을 쌓기 위해 휴학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지난해 8월 남녀 대학생 1170명을 대상으로 '휴학 계획'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 63.3%가 '휴학을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휴학 이유로는 '인턴십 참여와 자격증 취득 등 취업과 관련한 활동을 하기 위해'라는 의견이 응답률 48.9%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이어 ▲진로에 대한 고민 및 준비를 위해(26.0%) ▲졸업 시기를 늦추기 위해(21.2%) 등의 답변이 뒤를 이었다.
다만 충분한 진로 모색 시간을 가지지 않고 무작정 '취업'을 목표로 달리다 보면 번아웃을 호소할 위험이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직장인 김모씨(29)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 취업이 급해서 무작정 대학교 연계형 인턴으로 취업을 했다"며 "이후 정규직 전환에 성공해 지금까지 같은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진로 탐색을 위해 쉰다'고 하는 걸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이 많다"며 "나 자신을 먼저 알아야 행복한 인생이 되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렇자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에게도 갭이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격무에 지친 직장인들이 사표나 휴직계를 내고 수개월에서 1년가량 휴식을 취하며 그간 해보지 못했던 자기 계발 등을 통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지난 11일(현지시간) AP통신도 '성인 갭이어(adult gap year)'의 중요성에 대해 보도했다. AP통신은 "짧은 안식년이나 '성인 갭이어'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코로나19 이후 직장의 모습이 변화하면서 더 많은 사람이 예전처럼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다"며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더 길고 다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직장인 박 모 씨(28) 또한 "조만간 사표를 내고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할 예정"이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방향성을 모색하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최근 '갭이어 이직'을 선호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커리어 플랫폼 잡코리아는 최근 남녀 직장인 853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10명 중 7명에 해당하는 68.7%가 재직 중에 이직을 준비하는 '환승 이직'을, 나머지 31.3%는 휴식 후 다시 구직하는 '갭이어 이직'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갭이어 이직'을 선호한다고 답한 직장인들은 '새로운 직장으로 가기 전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싶어서(53.2%)'를 가장 높게 선택했고, 적정 휴식 기간은 평균 4개월로 집계됐다.
한편 갭이어를 다룬 책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에서 저자 김진영은 "달리고 있을 때는, 트랙 위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일에서 조금 떨어져야만 나 자신, 나의 일하는 모습, 그리고 내가 일에서 정말 좋아하고 잘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