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경기자
"사업을 시작한 지 24년 만에 제 이름을 찾았습니다."
서울 마곡에 위치한 ‘이노시뮬레이션’은 2000년에 설립된 메타버스(확장가상세계) 전문기업이다. 확장현실(XR) 기술 개발에 주력해 삼성전자, 현대차 등 대기업과 협업하고 수출까지 하는 코스닥 상장사다. 이노시뮬레이션을 창업한 조준희 대표는 국내 메타버스 1세대로, 업계에선 ‘대부’ ‘선배’라 불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회사를 어느 업종으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메타버스 산업을 정의하고 규율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초 ‘가상융합산업진흥법(메타버스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20년 넘게 묵은 체증이 풀렸다. 그는 "그동안 우리 회사를 소프트웨어 개발업이라고 할지, 기타 기계장비 제조업이라고 할지 혼란스러웠다"면서 "가상융합사업자로 정의된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했다.
지난 6일 이노시뮬레이션 사옥에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한 메타버스 기업인들과의 간담회가 열렸다. 올해 8월 시행을 앞둔 메타버스법을 설명하고 업계 목소리를 듣기 위한 자리였다. 발언 기회가 주어진 기업인들은 한목소리로 정부에 "감사하다" "고생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메타버스법에 기업인들이 극찬한 이유는 뭘까.
메타버스법은 ‘임시기준’과 ‘자율규제’라는 두 가지 핵심축으로 이뤄졌다. 특히 임시기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행하는 제도로 의미가 크다. 임시기준은 말 그대로 ‘임시로 마련한 기준’이다. 메타버스와 같은 신산업 혁신 서비스를 출시할 때는 법적 근거나 기술 기준이 불분명한 경우가 많다. 이때 일관성 있는 법 집행을 위해 임시기준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메타버스 플랫폼으로 가상현실에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경우 의료기기법에 저촉받는지 여부에 대해 불분명하면 임시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 업계에서 제안이 들어오면 이를 검토해 과기정통부 장관이 다른 부처 장관에게 임시기준 마련을 요청할 수 있고, 총리 주재 전략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시행된다.
임시기준 분과장을 맡은 현대원 서강대 교수는 "임시기준은 규제 샌드박스를 넘어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제도"라며 "업계 성공 사례가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뒷받침하는 메타버스 산업 육성을 위해 자율규제 조항도 법에 넣었다. 국내 메타버스 산업군을 대표할 협회를 지정하고 이 협회가 사업자들의 행동 강령, 운영 준칙을 정해 시행토록 했다. 또 이용자 보호 실태에 대한 자율 점검과 개선 활동도 병행한다. 이병진 과기정통부 디지털콘텐츠과장은 "신기술·서비스의 경우 사업자들의 자정 노력을 바탕으로 생태계를 구축하는 분위기가 중요하다"며 "해외에서도 자율규제를 확산해가는 추세"라고 말했다.
과기정통부 장관은 3년마다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일정 요건을 갖춘 기관을 ‘가상융합산업지원센터’로 지정해 예산 지원을 가능토록 했다. 기존 서비스를 메타버스로 전환해 성과를 낸 기업은 포상도 받을 수 있다. 메타버스 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른다’는 조항까지 넣었다.
메타버스 업계는 최근 들어 부진했다. 컴투버스, 컬러버스 등 일부 메타버스 전문기업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 통과를 계기로 전환점을 맞았다는 평가다. 정부는 민간과 힘을 합쳐 다음 달 중으로 하위법령을 만드는 등 후속 작업에 나선다. 황희 카카오헬스케어 대표는 "정부가 만성질환, 정신질환, 근골격계 분야 등에 많은 예산을 들여 지역 의료 사업을 하는데 70%가 인건비"라며 "메타버스 기술이 인력을 완벽히 대체할 순 없겠지만 효율적이고 빠른 속도로 지역사회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최근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을 방문해 윤석열 대통령과 메타버스 산업 성장 방안을 논의한 계기로 분위기 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용기 한국메타버스산업협회 부회장은 "최근 LG전자가 협회 가입을 타진해 왔다. 메타버스 부활을 알리는 신호"라며 "정부와 산업계가 한마음으로 뭉쳐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