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민기자
인공지능(AI) 학습을 위한 엔비디아의 그래픽프로세서(GPU) 칩 부족 현상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 사실상 시장을 독점한 엔비디아의 주가도 연일 고공행진하고 있다. 칩 부족 현상이 이어지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7조달러의 자금을 조달해 직접 칩을 설계하고 제작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도는 AI 칩 개발을 위한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올트먼 외에도 각국 정부와 기업들이 AI 칩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단순히 칩 개발만으로는 현재 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칩에는 반도체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비법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칩을 지원하는 소프트웨어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AI 칩 육성 방안도 소프트웨어 개발을 망라해 AI 칩 생태계를 마련해야 해야 하는 이유다.
유회준 카이스트(KAIST) 인공지능 반도체 대학원 교수는 각국의 AI 칩 개발 경쟁에서 핵심이 빠졌다는 진단을 내렸다. 유 교수는 "AI 칩은 소프트웨어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 시스템반도체의 시각으로 GPU를 대체할 칩을 개발해도 엔비디아와 경쟁하기도 전에 밀려날 수 있다는 경고다.
유 교수의 경고는 이미 현장에서도 확인된다. 인텔이 AI를 위해 인수했던 너바나 시스템즈 기술의 몰락은 칩에 집착하다 오히려 일을 망친 사례다. 너바나를 창업하고 인텔에 매각한 후 인텔 부사장을 지낸 나빈 라온은 엔비디아의 GPU를 대체하는 칩 개발을 목표로 했다. 라온은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인텔이 머뭇거리는 동안 엔비디아는 내가 개발하려던 AI 기능을 신속하게 개선해 대응했다"고 말했다. 인텔과 엔비디아의 운명을 가른 것은 단순한 칩의 성능이 아니었다. 라온은 인텔에서 독립해 객관적인 시각에서 엔비디아와 경쟁사의 칩을 비교하면서 큰 차이를 발견했다. 그는 엔비디아의 칩을 사용해 AI를 개발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커뮤니티를 엔비디아 경쟁사들이 뛰어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엔비디아가 개발한 개발언어 쿠다(CUDA)를 사용하는 이들의 힘이 엔비디아를 지탱하는 핵심축이라는 결론이다.
라온은 "(AI 개발자) 모두가 엔비디아의 칩을 먼저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미 엔비디아의 AI 칩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에 익숙한 개발자들이 굳이 다른 칩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개발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엔비디아 경쟁사의 칩을 사들이는 대신 엔비디아의 칩 공급을 기다리는 것이다. 엔비디아의 GPU를 대체하려는 대부분의 시도가 실패하고 엔비디아의 실적은 연일 시장의 기대를 초과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대니얼 뉴먼 푸투럼 그룹 애널리스트는 "놀랍겠지만 엔비디아의 고객들은 18개월도 기다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메타, 테슬라 등 주요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들도 AI 용 자체 칩을 개발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다. 시장조사 업체 옴디아는 엔비디아 AI 칩 매출의 70% 이상이 빅테크에서 나온다고 진단했다. 이는 단순히 칩을 개발했다는 것만으로 AI를 추진하기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다. 이미 엔비디아의 쿠다에 적응한 엔지니어들이 다른 기업의 칩을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학습할 이유가 없다.
더 뛰어난 성능을 가진 칩을 제조하더라고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현실은 학습용 전자계산기 시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국 고등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계산기의 성능은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떨어진다. 그런데도 수학 교사들은 TI의 칩을 구매해 수업에 사용할 것을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TI가 교사들에게 자사의 계산기 사용 교육을 지속해서 진행한 결과다. 미국 교사들은 아무리 성능이 좋은 계산기가 나와도 손에 익숙한 TI의 계산기를 선택한다. 이런 현상은 엔비디아의 GPU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대다수의 경쟁 기업들이 엔비디아 칩을 저렴하게 대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칩 성능에 걸맞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칩 개발보다도 많은 투자와 인력이 필요하다. 쿠다는 PC 게임의 화려한 그래픽을 담당하는 데 그쳤을 수도 있던 엔비디아의 GPU를 물리, 화학 등 과학 분야의 시뮬레이션에 사용할 수 있게 변신시켰다.
엔비디아 젠슨 황 CEO의 과감한 소프트웨어 투자도 빠질 수 없다. 그는 AI라는 GPU의 새로운 활용 분야를 확인한 후 쿠다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0년간 300억달러의 투자가 이뤄졌다. 엔비디아는 쿠다 외에도 개발자들의 수고를 덜어줄 다양한 소프트웨어 라이브러리를 만들어 지원했다. AI 개발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고심은 엔비디아와 AI 개발자를 하나로 엮어냈다. 쿠다 등장 초기부터 사용해온 전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소프트웨어 지원이 없는 AI 칩은 시장에 나와도 외면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월 열린 반도체 분야 민생토론회에서 AI 반도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후 정부는 AI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적극적인 행보에 나서고 있다. 박성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AI 반도체를 엮어 큰 그릇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클라우드'라는 용어를 세계 최초로 제시한 문송천 카이스트 명예교수는 "AI칩은 시스템 소프트웨어 없이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문 교수는 "정부와 산업계가 운영체제(OS)와 데이터베이스(DB) 등 소프트웨어 원천기술에도 주력해야 AI 중심 변화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문 교수는 이어 "곧 등장할 윈도12가 AI OS의 서막을 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도 더 이상 남의 것을 들여다 쓰는 기술 종속 단계를 벗어나 독자 OS개발의 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어설명:쿠다(CUDA)는 엔비디아의 GPU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래밍 툴이다. GPU의 코어를 활용해 병렬 작업을 수행하며 CPU에 비해 단순한 대규모 데이터 처리를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지원한다. 과학 및 엔지니어링, 딥러닝 및 인공지능, 의료 영상 처리, 금융 모델링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2006년 등장 이후 엔비디아의 지속적인 지원과 개발자들의 참여가 확대되며 발전해왔다. 엔비디아 생태계의 핵심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