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천자]레슬리 스티븐의 ‘걷기 예찬’

편집자주19세기 영국의 작가이자 비평가, 역사학자인 레슬리 스티븐은 매우 열성적인 등산가였다. 세계 최초의 산악회 ‘알파인클럽’의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걷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걷기 예찬>(1898)에 잘 드러나 있다. 그는 걷기가 몸과 마음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며, 걷기의 경험 하나하나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장을 구분 짓는 일종의 지표 역할을 해준다고 말한다. 걷기의 기억이 인생이라는 긴 여행, 즉 ‘지상 순례’에서 군데군데 쉬었다 가는 정거장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글자 수 955자.

진정으로 걷기를 즐기는 사람은 그 자체가 즐거워서 걷는다. 그는 걷기가 요구하는 육체적 강인함에 대한 자기만족을 넘어 잘난 체하지 않는다. 다리의 근육 운동은 다만 걷기가 자극하는 ‘두뇌 운동’이나 걸으며 떠오르는 조용한 명상이나 상상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며, 꾸준하게 땅을 밟고 나아가면서 지적인 균형감을 유지한다. 사이클 선수나 골프 선수도 공을 때리거나 페달을 밟는 중간중간에 스스로와 이런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진정으로 걷기를 즐기는 이유는 걷는 동안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한결같이 조용하게 사색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이클링이나 다른 여가 활동이 즐겁다고 해서 고전적인 걷기 여행을 유행에 뒤처진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 인생을 ‘잘 보낸’ 순간을 떠올려보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건이 중요하게 기억돼 있곤 한다.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머릿속 앨범을 열어보니 예전에 걸었던 경험들이 가장 뚜렷하게 떠오른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던 장면들은 큰 그림으로 통합되면서 뚜렷한 모습보다는 하나의 덩어리로 떠오른다. 삶을 밝혀주었던 친구와의 우정에 대한 기억은 특정 사건으로 연이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잊힌 수많은 기억과 겹쳐져 대체적인 인상으로 다가온다. 친구에 대한 기억은 나지만 그와 같이 나눈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걷기에 대한 기억은 특정 시공간대와 연관해 장소 및 시간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무의식적으로 달력 모양으로 떠오르면서 연관된 다른 기억들도 줄줄이 떠오르게 된다. 돌이켜보면, 일련의 모습들이 하나씩 떠오르면서 걷기 속에 담겨 있는 나의 ‘지상 순례(earthly pilgrimage)’의 매 단계를 보여준다. 각각의 모습은 한때 익숙했던 장소를 떠오르게 하고 장소와 연관된 생각들은 다시금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걷기의 즐거움>, 수지 크립스 엮음, 윤교찬·조애리 옮김, 인플루엔셜, 1만6800원

산업IT부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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