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애리기자
"잠시 하원 시키고 복귀합니다."
핀테크(금융+기술) 기업 핀다에서 근무하는 김수지씨(36)가 지난달 18일 오후 5시 업무 메신저인 슬랙에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딸 김은하양(4)을 데리러 가기 위해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육아도우미가 휴가를 가거나, 아이가 아픈 날 등 개인 사정이 있는 경우 재택근무를 선택하는 것이 김씨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날 기자가 방문한 김씨의 서울 동작구 사당동 집에는 재택근무를 위한 대형 모니터 2개와 업무용 책상 등을 갖춘 마치 사무실 같은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핀다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코어타임을 지키면 사무실 출근으로 쳐주고, 주 2회 재택이 가능하다. 일주일에 40시간을 자유롭게 채우면 되는 ‘커스텀 워크(개인 맞춤형 근무)’ 제도가 보편화되면서 유연하게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핀다 직원들의 일상이다. 이 때문에 핀다에는 워킹맘·대디들이 많다. 관리자급의 95%가 기혼자이고, 이 중 3분의 2가 자녀가 있다.
이날 재택근무를 택한 김씨는 이날 오전 8시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오전 11시 전사 주간 미팅, 오후 2시 팀원 채용을 위한 면접, 오후 3시 마케팅 미팅 등이 숨 가쁘게 이뤄졌다. 김씨는 "사무실과 다를 게 없다. 이 과정들이 화상으로 이뤄질 뿐"이라며 "이날은 근무시간이 긴 편이었지만, 6시간만 일하는 날도 있다"고 설명했다.
핀다는 전 직원이 참석하는 중요 회의도 생중계해 온라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후 김씨는 슬랙을 통해 부서원들과 소통하며 업무를 진행하다 오후 5시부터 30분간 운전해 상도동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김씨는 이날 딸의 어린이집 하원을 위해 1시간가량 자리를 비웠다가 복귀했다.
보통 육아도우미와 하원을 함께하던 은하양은 이날 엄마가 데리러 오자 한층 신난 모습이었다. 김씨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 친구 이야기를 쏟아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평소 하원길에 구경했던 창밖의 크리스마스 장식을 엄마에게 소개해주겠다며 연신 신나게 재잘거렸다.
김씨는 "아이가 어리면 자주 아픈데, 그런 경우에도 재택근무를 선택한다"며 "따로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재택인지 아닌지만 공유하면 된다"고 말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재택근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대면 업무가 필요할 때는 팀원들과 스케줄을 조정해 맞추는 방식이다. 핀다 직원들에겐 점심시간도 유동적이다. 업무를 하다가 점심이 늦어진 경우 슬랙에 ‘밥’ 모양의 아이콘을 띄워놓고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만 팀원들과 공유하면 된다.
핀다의 육아 친화적인 정책은 김씨와 같은 인재 영입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다른 기업에도 근무했던 김씨는 이직할 회사를 고려할 당시 핀다의 ‘커스텀 워크’ 제도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현대자동차에서는 남초 환경의 부서에서 근무했다 보니 롤모델로 삼을 만한 워킹맘이나 여성 임원이 없었고, 10년 뒤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핀다는 기본적으로 사내에 육아 친화적인 문화가 형성돼 있는 조직이다. 워킹맘·대디들이 아이 때문에 30분에서 1시간 자리를 비우는 것을 배려하고 양해받는 것이 핀다에서는 어렵지 않다. 본인이 시간을 유연하게 쓰는 대신 맡은 일을 책임지고 하면 된다. ‘아기 때문에 쉰다’는 것이 특별한 시선을 받는 일이 아니라 ‘일상’으로 취급된다. 실제로 이 같은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씨는 "일반 기업의 경우 일을 잘하고 있더라도 워킹맘들은 ‘감정적인 부채’가 쌓일 수밖에 없다"며 "애 병원 때문에 미팅을 바꾸는 게 가능한 회사와 ‘그걸 꼭 네가 가야해?’라는 피드백을 주는 회사의 차이"라고 강조했다.
‘자리 비움’은 워킹맘·대디뿐 아니라 모든 직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감정적인 부채감은 더욱 느낄 필요가 없다. 김씨는 "팀원 사례를 보면 일을 하다가 동물병원에 다녀오는 경우도 있고, 허리가 아파서 잠시 도수치료를 받고 온다는 경우도 있다"며 "일만 제대로 한다면 자리를 비우는 상황이 어떤 이유건 간에 양해받을 수 있다"고 했다.
육아 친화적인 문화가 잘 형성돼 있다 보니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다는 직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출산휴가를 앞둔 직원도 곳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남편이 육아를 더 책임지는 ‘주양육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워킹대디도 많다. 핀다의 1호 육아휴직자도 남성 직원이다.
다만 이 같은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하다. 유연근무가 자칫 근무 태만으로 이어질 경우 유지 자체가 어려워서다. 이재경 핀다 인사 총괄은 "제도를 잘 활용하고 있다 보니 육아 때문에 업무 퀄리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각자가 더 챙긴다"며 "아이가 있으니 70%밖에 못하는 모습이 나오면 (제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일을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육아를 이해하는 분위기’라고 이 총괄은 강조했다. 이 총괄은 "전에 다녔던 회사는 아기 때문에 쉰다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며 "일에 몰입을 못 하는 직원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에 그냥 반차를 내거나 연차를 내고 말았지만, 핀다에서는 잘 이야기만 하면 되고, 오히려 잠시 해결하고 오면 돼서 일의 연속성이 더 높은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아기가 있다고 돈을 더 주는 것보다 이런 ‘사내 문화’가 중요한 것 같다"며 "100만원을 더 받아도 갑자기 육아도우미를 못 구하는 상황이나, 마음이 불편해지는 상황이 오면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어렵다. 핀다는 기혼자 퇴사율이 낮은 편인데 이 같은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