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종기자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의 악몽을 떠올리며 두려워하고 있다."
2010년 7월 일본 보수 일간지 산케이 신문은 한국과 일본의 이차전지 사업을 비교하며 이같이 썼다. 한국 기업들이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에서 일본을 제쳤듯이 배터리 시장에서도 일본을 따돌릴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기업들의 걱정은 1년이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됐다.
이듬해가 되자 한국 기업들이 전 세계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에서 일본을 제쳤다는 통계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2011년 3월 일본 시장조사기관인 인터내셔널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IIT)는 2차전지 시장에서 삼성SDI가 20.0%의 점유율로 산요(19.3%)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3위는 LG화학(15.0%), 4위는 소니(11.9%)였다.
같은 해 9월 일본 시장조사업체인 테크노시스템리서치는 2분기 기준 전 세계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에서 한국이 42.6%로 일본(33.7%)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분기별 통계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일본을 제친 것이다.
리튬이온배터리 등 전 세계 2차 전지 시장에서 한때 90% 이상을 차지했던 일본 기업들은 2000년대 후반 들어 점유율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등 약세를 면치 못했다. 일본 경제산업성 조사에 따르면 2000년 리튬이온 전지 시장에서 일본의 점유율은 93%에 달했으나 2008년에는 48%로 쪼그라들었다. 대신 한국(22%), 중국(19%)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10년을 전후해 한국과 일본 배터리 기업의 상황이 뒤바뀐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당시 불어닥친 엔고의 영향으로 일본 기업들이 한국, 대만, 중국과의 가격 경쟁에서 크게 밀렸다. 이는 당시 일본 기업들이 겪었던 공통된 사항이다.
한국 기업들은 미국, 일본의 첨단 기술을 빨리 익힌 후 대규모 투자와 원가 절감 노력을 통해 품질이 좋으면서도 가격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선보였다. 이른바 캐치업(Catch up) 전략이다. 이에 반해 일본 기업들은 여전히 고품질의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엔화 강세 현상이 나타나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은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9년 중 일본 수출 제조업체의 채산성 환율(엔화 강세에 대해 수출 기업의 이익 유지가 가능한 환율 수준)은 달러당 93.2엔으로 조사됐으나 실제 달러당 엔화 환율은 83엔대까지 떨어져 15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엔화 강세는 그 이후에도 지속돼 2011년에는 달러당 엔화가 75엔대까지 떨어졌다. 국제 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에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두 번째 이유는 스마트폰 시장의 개화다. 애플이 2007년 6월 아이폰을 출시한 이래 모바일 시장엔 일대 변혁이 일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한국 전자 기업들은 변화된 시장 환경에 발 빠르게 대응해 스마트폰을 출시했다. 소니, 후지쯔, 도시바, 파나소닉 등 다수 일본 기업들도 스마트폰 시장을 내놓았으나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삼성전자, LG전자 스마트폰의 선전은 여기에 배터리를 공급하는 삼성SDI, LG화학 등 국내 배터리 기업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이는 소형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을 빠르게 추격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국내 기업들은 기존 리튬이온배터리보다 안전성이 강화된 리튬이온폴리머(리튬폴리머) 배터리를 출시하며 시장을 공략했다.
마지막으로 태동하는 전기차 시장에서 한국 기업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스마트폰, 노트북 등으로 리튬이온배터리 시장에서 일본을 추월한 한국 기업들은 미국, 유럽의 전기차 시장을 공략하며 선두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배터리는 그 자체로 시장을 형성할 수 없고 응용처(애플리케이션)에 전적으로 그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런데 전기차는 휴대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애플리케이션이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 용량은 스마트폰보다 수천 배 많다. 전기차 시장을 장악하면 배터리 시장을 손쉽게 석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갤럭시S23 일반 모델에는 3900밀리암페어시(mAh) 용량의 배터리가 들어 있다. 이를 와트시(Wh)로 변환(리튬이온배터리 평균 전압 3.7볼트 적용)하면 14.43Wh(3900mA×3.7V)가 된다. 이에 비해 테슬라의 모델3(롱레인지 모델 기준)의 배터리 용량은 85킬로와트시(KWh)다. 모델3 한 대에 갤럭시S23 배터리 5890개가 들어있는 셈이다.
전기차용 배터리를 선도한 것은 일본기업이다. 일본 도요타는 이미 1994년부터 연비 개선을 위한 연구개발(R&D) 프로젝트로 전기차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97년에 세계 최초 양산형 하이브리드카인 프리우스(PRIUS)를 출시했다. 그런데 도요타는 첫 출시부터 3세대 모델까지 프리우스에 니켈수소 배터리를 고집했다. 리튬이온배터리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무겁지만 안전하다는 이유에서다.
2010년엔 닛산이 세계 최초 양산형 순수 전기차인 '리프(leaf)'를 전격 발표하기도 했다. 리프에는 닛산과 NEC가 합작 설립한 AESC의 리튬이온 배터리가 들어갔다. 하지만 일본 전기차 업체들은 순수 전기차보다는 하이브리드카 대세일 것으로 보고 순수 전기차 개발과 출시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수소연료 자동차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2000년대 중반 발생한 노트북 화재도 이런 결정의 배경이 됐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 한국 기업들이다. 일본 기업들이 자국 내 시장에 몰두해 있는 사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 유럽 등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과 손잡고 적극적으로 전기차 시장을 공략했다. 한국과 일본 배터리 기업들의 상반된 전략은 이후 전개될 전기차 시대에 서 엇갈린 결과로 이어졌다.
LG화학은 2007년 현대, 기아와 리튬이온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하며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 진출했다. 이어 2009년 1월 GM과 전기차용 배터리를 단독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한 뒤에는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서 입지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이후 LG화학은 볼보, 르노 등 유럽 기업과도 전기차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충북 오창에 세계 첫 배터리 전용 공장도 건설하는 등 전기차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삼성SDI도 2008년 6월 보쉬와 합작법인인 SB리모티브를 설립해 전기차용 리튬이온배터리 공장을 설립했다. 삼성SDI는 이듬해 8월 BMW를 시작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잇달아 체결했다.
일본 기업 중엔 파나소닉만이 전기차 시대에 제대로 대응해 현재까지 체면을 지키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2008년 출시한 순수 전기차 '로드스터(Roadster)'에는 파나소닉의 18650 원통형 배터리 6831개가 직렬로 연결돼 있다. 테슬라는 노트북에 쓰이던 원통형 배터리를 그대로 전기차에 쓰면서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다.
일론 머스크의 이런 선택은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다른 완성차 업체들은 안전성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리튬폴리머 배터리를 대안으로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GM이 2010년에 출시한 쉐보레 볼트에는 LG화학이 개발한 리튬폴리머배터리가 탑재됐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가격이 비싸고 공정이 복잡한 리튬폴리머 배터리보다는 범용으로 쓰이는 원통형 리튬이온배터리를 채택했다. 원통형 배터리는 필연적으로 생기는 공간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열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당시 스타트업에 불과했던 테슬라는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해줄 파트너를 물색했다. 한국의 배터리 기업들은 이미 미국, 유럽 자동차 기업들과 제휴 관계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파나소닉이 테슬라와 손잡게 됐다.
로드스터와 2012년 출시한 고급 세단형 전기차 모델S의 잇따른 성공에 힘입어 기울어져 가던 파나소닉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일론 머스크는 원통형 배터리를 공급하기 위해 파나소닉과 함께 미국 네바다주에 세계 최대 리튬이온 배터리 공장인 기가팩토리를 건설했다. 그는 태양광 사업인 솔라시티에 사용할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리튬이온배터리도 필요했다.
2010년대 중반을 전후해서는 배터리 시장이 전기차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특히 2015년 체결된 파리 기후 협약은 전기차 등 친환경 자동차에 대한 관심을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됐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전기차가 미래 자동차 시장을 선도할 것이란 전망이 잇따랐다. 테슬라에 이어 GM, 포드, 폭스바겐, 볼보 등이 잇따라 전기차를 출시했다. 2010년 전 세계적으로 1만7000대에 불과했던 전기차 보유고는 2020년에 100만대를 넘어섰다. 2014년부터 2019년 사이에는 연간 60%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배터리 기업들도 전기차를 중심으로 사업 구조를 바꾸었다. 특히 기존 내연기관차 시장 진입이 늦었던 중국은 전기차 시장에 드라이브를 걸었고 그 결과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도약했다. 이때부터 한국의 LG화학, 삼성SDI, 일본의 파나소닉, AESC, 중국의 BYD, CATL 등이 경합하는 구도가 형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