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총리와 다르다”…정책 디테일에 강한 백전노장의 1년

정치색 옅은 무색무취 ‘실무·관리형 총리’
물밑에서 내각 조율하고 대통령 보좌
관료·정치권 접촉면 넓고, 현장소통 활발

한덕수 국무총리는 자타공인 ‘일벌레’다. 매주 월요일 총리실 전 직원에게 생중계되는 간부회의에서도 농담 한마디 없이 엄숙하게 업무에만 집중한다. 새벽부터 밤 늦게 까지 분주하게 움직이며 민생현장을 챙긴다. ‘우문현답’(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이라는 지론을 실행하기 위해서다. 현장에선 핸드폰 번호가 써진 명함을 몇십장씩 건네주고 “어려움이 있으면 전화 달라”고 당부한다. 주말에도 현안이 생기면 곧바로 간부들에게 전화해 상황을 체크한다. 만 73세의 고령인 그는 새벽에 깨 외신을 읽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촘촘하게 짜여진 일정을 무리없이 소화한다.

“한 평생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살려 지금의 도전과 위기를 이겨내는 일에 진력하겠다.”

1년 전 한 총리의 취임사다. 23일 취임 1년을 맞은 한 총리는 관료 사회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보·보수 정권 가리지 않고 40여년간 5개 정부에서 고위공직자로 등용돼 출세 가도를 달렸다. 특허청장과 산업부 차관, 초대 통상교섭본부장, 정책기획·경제수석비서관, 국무조정실장, 경제부총리, 주미대사 등 행정부 각 요직을 빠짐없이 지냈다.

백전노장 엘리트 관료 경험...국무위원 장악 수월

한 총리는 취임 직후 27회 진행된 국무회의 부의장으로서 관료 출신 국무위원들과 친밀하게 소통해왔다. 행정고시 8회인 한 총리는 행시 25회이자 제6대 기획재정부 장관인 추경호 부총리의 대선배다. 1986년 상공부 사무관으로 입사한 이창양 산업부 장관과도 근무 시기가 겹친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의 서울대 경제학과 선배다. 주미대사를 역임해, 외교부 고위 인사들과도 네트워킹이 깊다. 다보스 포럼이나 한미정상회담 등 외교이벤트 직후 해외 채널의 반응을 직접 전해듣고 참모들에게 공유하기도 한다. 측근들은 모든 직을 두루 거친 경험 덕분에 국무위원 장악이 쉽다고 귀띔했다.

특히 따뜻한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국무회의와 국정관계장관회의 등이 끝나면 모든 장관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다. 현안이 있는 부처 장관과는 따로 스탠딩 대화를 나누는 모습도 자주 목격된다.

이같은 스타일은 통상 ‘대권가도’로서 총리직을 수행했던 정치인 출신 총리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무색무취하지만, 물밑에서 내각을 조율하고 보좌하는 역할에만 집중한다. 정통 엘리트 관료로서 40여년 역량이 집약된 ‘실무형·관리형’ 총리의 모습이 극대화된 캐릭터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표를 의식해 특정 이벤트를 하거나, 정치색을 띄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과 관련해 “더이상 늦출 수 없다”고 소신발언을 했고, “포퓰리즘 정책은 용인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총리실 관계자는 “대권을 의식했던 총리들은 모든 행보에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선거에 흠이나 책 잡힐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데 신경을 썼다”면서 “한 총리는 다음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어 쌓아온 경륜 모두를 국정에 쏟아붙겠다는 마음인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총리실 고위관계자도 “정책의 밑단에서부터 위까지 맥을 잘 짚고 본질을 꿰뚫는 상사”라면서 “기업의 현실, 부처의 생리, 이해관계자의 반향을 잘 알고 정책의 급소와 완급을 잘 조절한다. 단기·중장기 과제를 선별해 지시해 모시기도 편하다”고 밝혔다.

실무형·관리형 총리, 국정에만 집중

한 총리가 디테일에 강한 전문 관료라는 점은 정부의 규제개혁 사례에서 잘 드러났다. 규제는 전 부처에서 퍼져있는 만큼 모든 부처의 개혁 추진력이 중요하다. 한 총리는 각 부처가 자체적으로 규제혁신 사례를 발표하고, 부처의 장관이 공과 성과를 가져가도록 했다. 동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대신 이해관계가 첨예하고 난도가 높은 과제는 국무조정실이 주도하는 규제혁신전략회의에 올렸다. 범부처적인 상생방안이 숙성돼, 이해관계 조정이 쉽도록한 것이다. 이를 통해 마트규제,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산업, 편의점 금연광고 부착 등 굵직한 성공 사례를 만들 수 있었다.

보수정권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못했던 대통령과 총리의 주례회동을 22차례 하면서 윤심(尹心)을 읽고 코로나19, 이태원 참사, 산불, 3고(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위기 등을 돌파해왔다. 대통령과 총리의 1:1 주례회동은 총리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 그 자체를 표시하는 자리다. 대통령의 행정 카운터 파트너이자 정부와 대통령간 통로로서 총리의 위상을 제고하는 자리기도 하다. 한 총리는 정치 신인인 윤 대통령의 부족한 국정운영 경험을 ‘그림자’로서 뒷받쳐왔다.

정치권 접촉면 두터워…국회 입법 설득도 활발

거야(巨野) 소통도 마찬가지다. 한 총리는 비슷한 또래인 김진표 국회의장(1947년생·한 총리 1949년생)과도 자주 통화한다. 의원입법 규제영향평가를 골자로 하는 ‘국회법 개정안’의 필요성을 설득해, 관련 법안이 추진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국회 통과가 절박한 정책의 경우 상임위원장에게 곧바로 전화해 입법 취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지난 달 26일 국내에서 5부요인(국회의장·대법원장·헌법재판소장·국무총리·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한 자리에 모여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리셉션’을 연 것도 한 총리의 아이디어다. “워싱턴은 벅적벅적한데 한국만 조용해서 되겠느냐”며 김 의장에게 행사를 제안했고, 김 의장이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성사됐다. 이날 행사에는 5부 요인과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이진복 정무수석 등이 참석해 근래에 보기 드문 ‘초당파’적 행사가 됐다.

이태원 참사 무단횡단 논란 등 구설도

한 총리는 취임 이후 여러 차례 구설에 휩싸였다. 이태원 참사 당시 ‘무단횡단’ 논란에 이어 외신기자 간담회 답변 과정에서 농담과 웃음으로 야당의 거센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실 영빈관 신축 추진에 대해 “신문을 보고 알았다”고 말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강제징용배상 해법을 두고도 ‘돌덩이를 치웠다’고 표현해 비판을 받았다.

정치부 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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