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모기자
1904년 10월 일본은 제1차 한일협약을 근거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1853~1926)를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파견한다. 메가타는 부임 직후 곧바로 대한제국의 재정과 경제적 예속작업에 착수한다. 1905년 그는 대한제국의 화폐인 백동화를 일본제일은행권 화폐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실시했는데, 화폐 교환 기간은 단 3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방적인 화폐개혁에 수많은 상인과 민족 자본가는 물론 화폐를 교환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대다수 백성은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몰락했다.
침략 정책 수행에 앞장섰던 메가타는 우리 전통주 문화가 몰락하는 단초도 제공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는 세수 확보를 위해 주세령을 통해 주류 제조를 면허제로 바꾸고 신고하지 않은 술에 대해선 밀주로 단속했다. 집집마다 빚어오던 가양주(家釀酒)에 대해서도 자가용 제조 면허를 받도록 했는데, 자가용 술에는 판매용 술보다 높은 세율을 매겨 총독부가 관리하는 양조업체들의 술을 사 마시도록 유도했다.
여기에 가양주 면허자가 사망하면 상속인이 면허를 이어받을 수도 없게 제한하면서 면허제 시행 초기 30만명이 넘었던 자가용 제조 면허권자는 1934년 이후에는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마을마다 고유한 비법으로 꽃을 피우던 우리 가양주 문화가 사실상 사멸한 순간이었다. 이후 광복을 맞았지만, 군사정권에서도 식량 문제 등을 이유로 양조에 대한 통제는 이어졌고, 우리 가양주 문화와 주조법은 대부분 실전(失傳)되고 말았다.
밀주가 되어 지하로 숨거나 대가 끊겨 사라졌던 우리 전통주 문화와 양조법이 다시금 양지로 모습을 드러낸 건 1980년대 이후 주류 관련 규제와 제약이 조금씩 완화되면서부터다. 이후 1990년대 들어 전통문화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며 더디지만 서서히 다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이를 토대로 새로운 양조 기법 등이 더해지면서 지역마다 양조장마다 의미 있는 결실을 하나씩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경기도 군포시 수리산 남쪽에 자리 잡은 ‘가양주작(家釀酒作)’도 마을마다 특색 있는 술을 빚어내던 우리 가양주 문화의 복원을 꿈꾸며 술을 빚기 시작했다. 마을공동체를 기원으로 하는 가양주작의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역 내 대야초등학교가 새로 문을 열면서 인근 둔대초등학교는 폐교 위기에 몰린다.
작은 학교였지만 손 놓고 폐교를 기다리기에는 아쉬웠다. 무엇보다 지역 내 기성 공교육의 획일적인 커리큘럼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주도적인 교육을 제공할 수 있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고, 둔대초등학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뜻이 모였다. 같은 뜻으로 모인 주민들이 학교를 유지하기 위해 마을공동체 ‘대야미마을협동조합’을 결성했고, 이후 둔대초등학교는 혁신학교로 지정돼 지금까지 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야미마을협동조합은 둔대초등학교의 혁신학교 지정 이후에도 다양한 교육사업과 동아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운영됐다. 가양주작도 조합 내 20여개의 동아리 중 하나인 전통주 동아리였다. 김은성 가양주작 대표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교육한다고 해서 그대로 살지 않는다”며 “어른들이 말보다는 직접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어른들의 동아리도 활성화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커지면서 자체 사업을 통해 자생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전통주 동아리를 발전시켜 주점과 양조장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마침 2016년 2월 주세법 개정을 통해 ‘하우스 막걸리’의 제도화가 마련된 참이었다.
김 대표는 “처음엔 인근 제 사무실 한편을 술방 삼아서 모여 술을 만들고 나눠 마셨지만 공간 등에서 아쉬움이 있었다”며 “그러다 공동체의 자족력을 키우고 아지트도 만들 겸 술을 만들어보자는데 의견이 모여 사업화까지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김 대표를 중심으로 전통주 동아리는 그해 2월 사업설명회를 통해 출자자를 모집하고 탁주와 약주 제조 면허를 취득해 농업회사법인 ‘가양주작’을 설립했다.
전통주 동아리가 가양주작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김 대표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김 대표는 졸업 이후 20년 가까이 수면 관련 의료기기 사업을 운영했다. 사업가였던 그가 술 빚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일본 출장 중 교토에서 맛본 사케 한잔 때문이었다. 조그마한 식당에서 소규모로 빚어낸 술이었는데, 그 맛이 너무나 훌륭해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한동안 청주란 청주는 죄다 찾아 마셨다.
김 대표는 “처음 마셨을 땐 물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다가 서서히 도수가 올라오는 게 너무 매력적이었다”며 “우리도 가양주 문화가 있는데 나도 한번 만들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 독학으로 술을 빚기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홀로 술을 빚어낸 시간이 10년이었다. 처음엔 제맛을 내지 못하던 술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품질이 개선되고 주변의 반응도 좋아졌다. 10년의 내공은 그렇게 전통주 동아리를 거쳐 오롯이 양조장 설립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를 통해 더 제대로 배울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감도 얻게 됐다”고 회상했다.
2016년 문을 연 가양주작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건 김 대표가 의료기기 사업을 정리하고 가양주작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2019년부터다. 이전까지 가양주작은 자체 주점 내 소비되는 물량 정도의 술만 빚어냈다. 주점 겸 양조장이었지만 사실상 주점에 가까웠다. 하지만 김 대표가 전업으로 가양주작에 뛰어들면서 진정한 양조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하우스 막걸리를 넘어 정규 제품 라인업을 구축했고 외부판매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수리산 수암봉에서 이름을 따온 ‘수암(水?)’ 약주는 가양주작의 매출 80%를 차지하는 얼굴과 같은 술이다. 수암주는 인근지역 쌀과 우리 밀 누룩으로 빚어 7일간 발효한 술을 사계절 5도(°C)로 유지되는 황토 숙성실에서 3~6개월간 숙성시키고 맑게 뜬 술만 따로 덜어낸 뒤 여과해 담아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김 대표는 약주를 비롯해 전통주의 맛을 좌우하는 핵심은 숙성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예로부터 약주 가운데 최고로 치던 것이 가을에 추수한 쌀로 술을 담근 뒤 땅에 묻어 겨울을 난 술”이라며 “수암주는 겨울철 땅속 저온 숙성 환경을 재현하기 위해 협동조합원들이 직접 벽돌을 날라 지은 황토 숙성실에서 장기 숙성을 거쳐 선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가양주작의 수암은 50리터(ℓ) 술덧에서 맑게 뜬 10ℓ 정도만 덜어내 담은 귀한 술인 동시에 다양한 향을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술이다. 김 대표는 “숙성을 마친 약주는 여러 가지 과일 향이 나며 드라이한 맛을 느낄 수 있다”며 “수암주는 누룩에 있는 자연 효모가 품어내는 에스테르에서 워낙 다채로운 향이 나기 때문에 테이스팅 노트를 적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수암과 같은 결을 유지하면서 탁주로 만들어진 것이 ‘수리산 막걸리’다. 수리산 막걸리는 7일간 발효하고 손으로 짜낸 술에 절반의 물만 가수하고 일체의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도 10도로 일반 막걸리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높다. 특히 막걸리임에도 6개월가량 숙성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김 대표는 “단기 숙성한 막걸리는 단맛과 탄산이 강해 우리가 원하는 맛과 거리가 멀었다”며 “장기 숙성을 거쳐 단맛이나 탄산이 거의 없게 만들어 반주로 음식과 즐기기에 좋다”고 설명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