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조슬기나특파원
이춘희기자
이지은기자
[아시아경제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이춘희 기자, 이지은 기자]미국과 중국의 첨단 기술 패권 싸움이 반도체에 이어 바이오·의료기기 분야에서도 가속화하고 있다. 취임 이후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며 노골적인 ‘공급망 퇴출’을 시사해 온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자국 내 바이오 분야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20억달러(약 2조7880억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중국 역시 병원 등에 외국산 의료장비 공급을 배제하는 동시에 연구개발(R&D) 및 부품 조달처를 자국으로 이전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전 세계 바이오 시장에서 1·2위를 차지하는 미국과 중국이 본격적인 주도권 다툼에 나서며 한국 기업들의 피해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백악관은 14일(현지시간)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회의를 진행하고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국내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신규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앞서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12일 서명한 ‘국가 생명공학 및 바이오 제조 이니셔티브’ 행정명령의 후속 조치다.
이날 회의에는 보건, 에너지, 국방, 농무, 상무부 등 관계 부처 고위 당국자들이 총출동했다. 이들 부처는 행정 명령 이행을 위해 20억달러 규모의 정부 예산을 활용하기로 했다.
먼저 국방부는 국내 바이오 제조 생산기반을 구축하는 데 5년간 10억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사이버 공격으로부터 시설 보안을 향상시키기 위해 2억달러를 추가 투자한다. 백악관은 "이러한 지원은 민간 및 공공 부문 파트너가 중요한 화학 물질과 같이 상업 및 국방 공급망 모두에 중요한 제품의 제조 능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5년간 2억7000만달러를 투입해 군에 필요한 생명공학 소재의 개발, 탄력적인 공급망 프로그램도 지원할 예정이다.
보건복지부는 항생제 및 필수 의약품, 전염병 대응에 필요한 약물에 들어가는 원료 생산 등에 4000만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에너지부는 바이오매스와 폐기물로 연료, 화학물, 소재를 만드는 데 필요한 R&D와 상업화 등에 1억6000만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약 10억t에 달하는 바이오 폐기물 자원 등을 활용해 화학물질, 재료에 대한 국내 공급망을 제공할 수 있도록 교통부 등과도 협력한다. 농무부는 지속가능한 혁신적인 비료를 자체 생산하는 데 2억5000만달러를 투입하기로 했다.
바이오산업 R&D에서 전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미국은 첨단 제품 생산에서 중국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는 점을 경계해 이번 조치를 마련했다. 앞서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부문에서 확인된 노골적인 중국 배제 움직임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특히 코로나19 사태로 바이오 산업의 중요성은 한층 커진 상태다.
이날 회의에서도 중국을 경계하는 발언이 재차 나왔다.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해외에서 우리의 지정학적 비교우위를 유지·강화하려면 국내에서 국력의 원천을 채우고 재활성화해야 한다"며 "생명공학은 그 노력의 중심"이라고 강조했다.
중국 역시 반도체 굴기에 이어 글로벌 시장에서 바이오·생명공학 주도권을 노리고 있다. 앞서 ‘바이오경제 개발 5개년 종합 계획’을 공개한 데 이어, 최근에는 의료기기 시장에서 외국산 제품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5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중국의 산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등의 지방 정부는 지난 4월부터 지역 내 병원에 중국산 의료기기를 사용하라는 지침을 전달 중이다. 이는 5월 중국 정부가 내린 내부 통지를 의식한 행보다. 중국 정부는 관련 업계를 대상으로 의료분야에 사용되는 315개의 부품을 조달할 때는 국산품 사용을 우선시하라는 지침을 전달했었다.
이에 더해 중국 정부는 지난 7월 정부 조달법 개정 초안을 발표하고 핵심 부품의 조달처를 자국으로 옮길 것을 기업들에 요구하고 있다. 조달법 개정안은 의료기기를 비롯해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의 생산을 설계부터 개발까지 모두 자국 내에서 마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반도체에 이어 바이오 분야에서도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함에 따라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중국의 시도로 해석된다. 신문은 "미국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기업을 배제하려 하자 이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중국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 강화에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히타치 하이테크, 독일 지멘스 등 일부 기업들은 중국에서 의료기기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생산 체계의 변화를 추진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미국이 지원금을 받은 기업의 대중국 투자를 제한하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까지 포함하며 노골적인 중국 보이콧 행보를 보이고 있는 만큼, 이 경우 미·중 갈등의 소용돌이에 더 빠져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잇따른다.
미·중 갈등의 한가운데 낀 한국 바이오·의료기기 업계에서는 적절한 대응 전략을 모색하는 것이 중대 과제로 떠올랐다. 바이오산업 면에서는 일종의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 섞인 분석이 나오지만 의료기기 업계에서는 기술 경쟁력 확보 없이는 주요 시장인 중국을 놓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 업계에서는 글로벌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스스로 위탁개발생산(CDMO) 비중을 늘리고 있고 진입장벽이 높은 산업의 특성상 미국의 행정명령에 따른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정유경 신영증권 연구원은 "이번 행정명령의 즉각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며 "CDMO는 복수의 생산거점 확보를 위해 이용되고 상당한 물량을 위탁하므로 미국 내 생산만으로 전환하기는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도 "바이오의약품은 전기차 등과 달리 적극적인 보조금 정책 등을 펼치기도 쉽지 않아 국내 산업에 미칠 타격이 크지 않다"면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산업 육성책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미국 진출을 고민해 온 업체에서는 오히려 적극적 투자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캘리포니아주, 워싱턴주 등을 신규 공장 후보지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의료기기 산업은 중국의 외산 의료기기 억제 정책이 현실화할 경우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 일본, 독일 등 의료기기 선진국뿐 아니라 최근 중국 시장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는 국내 기업들도 피해가 예상된다.
한국무역협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중국의 의료기기 시장 규모는 192조원으로, 세계 최대 의료기기 시장을 갖춘 미국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 수출된 의료기기는 7억2800만달러 규모로 미국(9억1600만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유행 영향으로 다소 주춤했지만 다시 전년 대비 34.9%나 증가하면서 수출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주력 품목인 임플란트, 초음파 영상 진단기를 중심으로 수출액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외산 의료기기 억제가 이뤄진다면 이 같은 성장세가 급격히 꺾일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의료기기 업계 관계자는 "의약품과 달리 의료기기는 공산품에 가깝다"며 "중국 정부가 의료기기 핵심부품에 대한 국산화율 제고를 몇 년 전부터 강조해온 만큼 수입 대체가 빠르게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의료기기 업체들이 기술력 격차를 유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지적이 제기된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다만 초음파, MRI 등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의료기기는 아직도 중국 시장에서 외국 기업의 점유율이 80%대에 이른다"며 "대중 수출 주요 품목인 초음파 등 고부가가치 품목에서는 당장은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욕=조슬기나 특파원 seul@asiae.co.kr이춘희 기자 spring@asiae.co.kr이지은 기자 jelee0429@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